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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11. 2023

신앙의 자폐 스펙트럼

 기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믿음을 가진 지 오래되어도 여전히 "상처" 운운하고 있고, 기초 성경 공부에만 매달리고, 인정받으려 만 하고, 섬김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니, 많을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 파레토 법칙은 이곳에서도 예외 없어, 20은  열심히 섬기고 80은 누린다. 좀 더 솔직하게 강조하자면 교회는 10대 90의 수퍼파렛토 법칙이 적용되는데, 이것을 탈피해 10이 20으로, 또 30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교회가 할 일이다.


특별하지 않지만 색다른 경험의 고백

지난 4월 부활절 특별 새벽 기도를 한 주간 나갔다. 이후 지금 까지 꾸준히 새벽을 깨우며 기도회 참석이 일상화되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지난 허물이 생각났고, 살아온 흔적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말씀을 대하는 시간,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수준 낮은 나의 현상을 보게 된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세 가지다.


첫 째, 쉴 새 없는 “상처"의 운운이다. 누가 지나치며 하는 이야기에도 쉽게 무너지고 분노했다. 길을 가게 된 목적을 잊어버리고 걸치적거리는 걸림돌과 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사로운  감정 따위의 것들에 대해 타인과 나누면서 믿음에 대해 인정받고 위로를 갈구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은 몸과 마음이 모두 성숙해야 마땅하다. 몸은 크되 정신이 아이인 사람은 다 자폐스펙트럼으로 불리는데, 이런 현상이 크리스천 세계에는 비일 비재하다. 바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답답해하며 정곡으로 지적했던 내용이다.


기초에 매달리는 성경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병폐도 있다. 세월이 지나도 기초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성경을 대해 진심이었던 적이 없거나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보고 듣는 것으로 은혜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잊어 먹는다. ‘나’라는 존재의 일상을 지키시고 세우시는 작업은 하나님의 몫이고, 나는 퍙안의 덕목에 매달려 도전의식을 망각하니 도무지 영육이 성숙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가 되었다. 성도들은 잘 잊기 때문애, 그리고 들은 것에 대해 별 연구를 하지 않는 관계로 추후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해도 그저 새로운 내용으로 듣는다. 늘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하는 설교자에겐 이 부분이 위로가 된다.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한다고 하자. 겹치고 비슷한 스토리에 공부하지 않는 목사로 비난받을까 노심초사 하지않겠는가?


이렇게, 대 부분의 사람은 듣고 보는 것에서 순간적인 은혜를 체험하고 까먹는다. 자신의 것으로 삶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나’라는 존재임을 알게되었다.


믿음을 가진 지, 엄밀히 말해, 교회에 나간 지 3-40년이 되어도 유치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병폐 하나는 최악이다. 지식의 결핍을 떠나 인정받으려는 욕구의 측면에서다.


섬김 받으려는 것에 전전 긍긍하는 태도도 꼴 사납기 마찬가지다. 도무지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의 경험을 예로 들어 본다.


몇 년 전 교회의 한 구역을 담당하는 구역장으로 섬겼는데, 구역원 중에 캐나다로 두 자녀 유학을 위해 함께 온 엄마가 있었다. 유학 올 정도면 가정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모임을 잘 참석했고 나눔도 솔직했다. 그런데, 주일 아침이면 같은 동네에 사는 우리(아내와 나)는 그 분의 어려운 부탁을 받아야 했다. 성가대 연습에 참석하려 1시간 정도 일찍 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두 자녀를 함께 데려가기를 원했다. 학생부 예배가 그 시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본인은 한 시간 일찍 교회에 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어 번 부탁을 들어줬다가 그다음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분의 삶과 신앙에도 옳지 않다는 판단이다. 본인이 두 번 왔다 갔다 하던지 일찍 가서 QT를 하면 어떻겠냐고 권면과 함께.


이와 같은 극도의 이기적 태도는 아니지만, 섬김만 받으려는 성도의 모습은 수없이 많이 보아 오고 있다. 가정에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으나, 본인은 초대 한 번 하지 않는 경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식당에서 여러 번 밥 값을 지불했으나 상대방은 십여 년이 지나도 그렇게 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사람은 서로 표현을 하고 안 하고에 있어서 다를 뿐이지 생각을 모두 동일하다.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슬프다. 칭찬의 말 한마디에 스스로 으쓱하지만, 모욕당하는 말에 수치를 느낀다. 단지 누구는 표현을 잘하고, 누구는 묵묵히 있을 뿐이다. 베푸는 일이 반복될수록 상대방의 베풂도 생각하게 되어있고,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결국 기부 앤 테이크 (Give & Take)가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인정받으려 하는 욕구로 똘똘 뭉친 경우도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크리스천의 한 모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부분에 부끄럽다. 성가대를 한 지 30년이 되어가고, 솔로로 활동하고 있었다. 앞에 나서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고,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익숙했다. 뒤돌아 보건대, 찬양을 드린 여러 청중과 자리만 달랐지 하나도 다르지 않는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고, 뭔가 다른 수준의 인물로 여겨왔던 교만이 하늘을 찌른 듯 뒤돌아 보면 부끄럽다. 그래서 좀 쉬기로 했다. 나서지 않고 기도와 말씀에 열중하기로 했다. 또 합당한 기회가 있으면 다시 겸손한 자세로 찬양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브리서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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