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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21. 2023

내 안의 적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 칭기즈칸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천성적인 꼬드김, 내부로부터의 적

믿음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신앙인에게는 시작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는 시험이라는 복병이 있다. 믿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믿기 때문에 저항해야 하는 세력이 있다. 밖에서 오는 압력과 자신 내부에서 시작하는 천성적인 죄의 꼬드김이다.


심각한 외부로부터의 고난에는 정작 믿음을 지키기 쉬운 편이다. 공산당이 총을 들이대며 믿음의 대상을 부인하라고 한다던가, 테러리스트들 앞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둔 선교사의 극단적 상황에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이웃으로부터 미움과 오해를 받는 등, 크고 작은 압력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선택이 단순하고 쉬울 수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외치는 담대함이 어쩌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암ㅎ게 할 수가 있다. 믿음은 그래야 하고, 그런거니까.

그런데, 내부로부터의 시험은 이야기가 다르다.


대나무는 단단한데 갈대는 흔들린다. 작게 흔들리는 것에는 무뎌지고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인의 속삭임과, 강아지의 꼬리 흔듦이 왜 그렇게 간지러운가.


미움을 예로 이야기해 보겠다. 믿음은 미움에 대해 싸우기를 추천하지만, 미운 사람은 미워해야 하는 것이 본심이다. 게다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미움이 가득한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이력도 감춘 채 찾아와 함께 이룬 공동체다. 수많은 갈등과 인간의 치사한 인격이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한계려니 그냥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만큼, 이도 저도 미운 사람들이 종종 이 말 저 말을 옮기고 다닌다. 슬로건처럼 부풀려진 사랑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어떤 누구도 마찬 가지로 물들어 버린다.


말씀은, 사람 내부로부터의 이러한 작은 미움과 시험 하나까지 다스리기를 원한다. 성적 유혹을 뿌리친 다윗처럼, 밧세바를 뿌리치고 나와야 함을 보여준다. 싫은 자에게 싫다고 반응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은 그 미움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사탄은 기도하는 자에게선, 미움이라는 마응의 방에서 너무도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를 넘어트리는 내부로부터의 적은 죄라는 명목으로 불린다. 인간은 죄의 속성을 타고났으니, 죄와는 친근함이 옳다. 그러나 죄는 결국 인간을 말살시키는 무서운 세력이다.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죄를 직시하고, 스스로의 죄를 꼬집어 끄집어 내놓고, 이것들과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일이 스스로 넘어지지 않는 첫 번째 이자 최고의 방법이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혼자 집에서 기도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과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내부로부터의 속삭임인 스스로의 타협과 게으름이 발상의 온상지다.


도전 앞에 서서


내부로부터의 잘못된 신호로 정신적 파탄이 있었는가? 공황장애라는 뜸금없는 자가 진단이, 여러 해에 걸친 수많은 속삭임 탓에 잠까지 설치며 불안한 시간을 이어지게 했다. 남의 생각을 내 심장으로 끌고 들어와 당연한 듯 황폐하더니, 또 어느 순간 용서하는 일들이 반복된다. 지금도 양날의 검처럼 날카로운 두 사상이 나를 몰고 간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적개심이다.


해결책으로 받아들인 것이 “철창 속 작은 새의 도피“다. 머뭇거리지 않기로 했다. 어떤 행동이나  말, 그리고 도전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그렇게 해야 할 마땅한 가치가 있다면,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경험으로 터득한 교훈을 발라내, 작은 것부터 적용함으로 나를 새롭게 하려는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아침을 맞았다. 밖으로부터의 압력이나 자극, 혹은 내부로부터의 배타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들을 추스르자. 죄의 속성은 그것을 다스리라고 있는 것이다. 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히브리서 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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