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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25. 2023

“믿음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

믿음을 가지는 일은 행복하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주변 환경에서 견고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를 가지는 일이며, 의지할 존재를 곁에 두게 되는 특권이다.


믿음을 갖기로 결정하는 일만큼 눈부신 지혜도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에게 의존하기로 한 것, 특히 의지의 대상이 세상 왕이나 권력자처럼 기분에 따라 힘을 휘두르는 자가 아니라면 더욱 탁월한 선택이고, 바로 그 선택이 지혜로운 일이다. 누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 나약함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을까.


혹자는 스스로의 길은 스스로 개척해 간다. 강한 자의 표증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진짜 강해기지 위해서 아프거나 슬플 때는 누구에게든 찾아가 해답과 보호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허공에 외치던 수많은 자연신 숭배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든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울고 싶을 때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존재라면, 어느 시대이고 유한한 능력의 소유자인 사람에겐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것이 실질적인 힘과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 그 전제조건이 무엇일까? 바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다. 정도에 따라 극한의 때에 힘을 발휘할 수 있던가 그렇지 않던가가 결정된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믿음은 신뢰에서 온다. 믿음의 대상자에 대해 알고 경험함으로 신뢰는 쌓이는데, 그 농도에 따라 삶과 행동이 좌우된다. 이제는 한물 간 이데올로기 이념에 물들었던 시절,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이 그들의 세상이고 천국인 냥 세상을 바꾸려고 부단히 사람을 죽였다. 극우도 다르지 않다. 남북이 갈리고 난 후 대한민국 근대사에 극우의 활동은 역사를 피비린내로 장식했다. 모두 다 믿는 것에 대한 신뢰가 투철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 영향력은 다르다. 폭력적이지 않다. 차라리 순종으로 폭력을 덮는다. 피비린내를 싫어하고, 차라리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세상을 정복하되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황당한 가능성을 끝까지 실천한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 믿음을 가졌다 하는 사람이, 그 믿음이 약할 때 나타나는 증상은, 흔들림이다. 귀가 얇고 행동이 작은 일에 이리저리 쏠린다. 이럴 경우, 믿음은 "믿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믿고 싶은 것", 혹은 "믿기 위해 애쓰는 극도의 주관적 행보"로 변경해 불려야 한다.


사라의 경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예는 믿음에 대해 쉽고도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자녀에 대한 약속을 받았을 때의 그들 부부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99세와 90세다. 그 나이에, 몇 년 더 산다는 식의 약속외에 어떤 장담도 헛될 것이다. 절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황당한 말에 대해 큰 의심 없이 믿음을 가졌던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와 지식 때문이고, 사라는 그 신뢰를 바탕으로 "힘"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강력한 삶의 원기력과 믿음의 근거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연 믿을 만한 분이고, 허튼 약속을 하시는 분은 아니신가를 질문해 보면 신뢰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성경에 나타난 7487 가지의 약속 중 현재까지 99% 이상 성취된 사실적 증거를 볼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에 가깝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가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전 앞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는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 같은, 불가능에서 가능을 이야기하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아들을 재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던 일은 다른 어떤 사람이 따라 하기 힘든 수준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바치면 약속하신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겠다"는 말이 성취가 안 됨으로 아들의 부활까지 바라본 그의 믿음이다.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이름들이 언급된다. 그들 누구 하나 쉬운 순종과 신뢰를 한 경우는 어느 누구도 없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가. 신뢰, 그리고 순종의 수순에서 결핍사유가 허다하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것을 증언하자면 법정에서 증거를 들이대고 나를 송사할 근거가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앙인은 노력하는 사람이다.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에 신앙인이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고, 기초적 성경을 다시 공부하고,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눈앞의 현상을 넘어 배경과 징조를 읽으려 하고,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자 힘쓰는 사람이다. 그냥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이 아니다. 더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오늘도 한 문장 한 문장을 더듬는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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