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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Nov 15. 2023

미래를 위한 딱 한 가지 준비물

때가 오리리 가진 것도 뺏기리라... 기도의 근육을 키우자

기상을 서두른다. 갈 곳이 있어 새벽을 깨우는 중이다. 새벽 5시 15분 알람을 끄고, 이 시간이면 반드시 열려 있을 교회 예배당으로 향하기 위함이다. 기도의 자리에 가서 아침 설교를 듣고 묵상 큐티를 하는 일만큼 하루를 깔끔하게 여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두 시간 더 자는 일이 대한 유혹은 이제 더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편이라 매력적이지 못하다.


겨우 지나온 하루의 죄는 지붕에 끼는 이끼처럼 짧은 시간에도 영혼에 들러붙었다. 이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응당 위로를 얻는 일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아침 운동 같은 느낌이다. 눌러앉아 더 잠을 청하려 하다가도 속에서 분출하는 열망이 등짝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곧 다시 일어나 뒤늦게 달려가야 할 때도 있을 만큼, 습관이 되어 가는 중이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무엇이든 지금의 하는 일을 가까운 미래에도 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모든 일이 우리의 생각과 같이 절대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내 생각이나 계획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처하게 된 환경이 어쩌면 더 좋은 결과가 되었다는 경험, 누구에게나 하나 둘 쯤 있다.


아무도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동안에, 그 전쟁이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더 정확히 말해 하마스와의 전쟁은, 아랍 강국과 이스라엘의 강대강 구도로나 가능할 법했을 텐데, 화풀이용 미사일 수천 발 쏴 올렸다가 몇 배로 되돌려 받는 경우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어 수많은 희생이 있고 나서야 이전보가 더 좋은 때가 올까?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생각지도 않던 일을 당하고 나서 이전보다 좋아지길 바랄 뿐, 인류는 있던 것을 어느 순간 다 잃어버리도 뒤늦게 슬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어날 일로 생각한 것이 일어났다고 해서 놀라지 않는다. 당연한 것에 감사를 가지는 일은 훈련과 정교한 노력으로 가능하다. 당연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다 그렇다. 순리를 거슬러,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어떨까? 겨우 소도시 게릴라에 지나지 않는 하마스가 강한 이스라엘에 수천발의 미사일로 분노를 표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당초 선재 공격을 구상할 때는 그 결과를 눈에 보듯 뻔하게 예상했을 것인데, 결과가 역시 그랬다. 초토화된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이번에는 하마스를 완전 뿌리 뽑아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을, 하마스 기지가 바로 그 땅 밑에 숨겨져 있는 병원을 공격한다는 비난으로 세계여론을 몰아가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잘 먹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상은 하마스의 멸절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며 동의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일어나는 일이 미래에도 가능하다고 짐작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그냥 우리는 오늘의 일어나는 일을 잘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기도에 관한 너무도 당연한 상상도 이와 같다. 미래에는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할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불가항력적인 환경의 변화 때문에라도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그 원인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화, 혹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원인일 수 있다. 그중에 개인이 처한 특수 상황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때가 올 경우라면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가치가 "똥값"이 된다. 젊을 때는 할 일이 많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 잘 모를지 모른다. 미래에도 할 일이 있고, 찾아주는 이도 있으며, 갈 곳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재능과 권력과 신분은 어느 나이가 되면 휴지 조각이 된다. 좋은 친구를 만들어 놓거나,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두거나, 미래를 위한 재물을 비축해 두지 않으면, 어느 나이가 되면 갈 곳도, 할 일도, 살 곳도 없게 되기 마련이다.


기도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옳다. 한창나이에는 제 잘나서 산다. 기도보다는 활동과 관계에 충실한다. 기도는 그들에게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는 남의 일이고. 모임 기도를 시키면 손사례를 찬다던가, 대표기도를 앞두고는 무대공포증 같은 긴장과 떨림으로 십여 일을 떨면서 보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멍석이 깔린 기도회에 가게 되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거나, 몇 가지 기도하다 보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진다. 도대체 30분, 1시간 기도하는 사람은 "중언부언" 하지 않고는 어떻게 저리 긴 시간 기도할 수 있을까?


기도의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교과서를 들여다본다거나, 기도에 관한 강연에 참여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험 실습인 바로 기도의 자리에 나가 엉덩이가 아프도록 앉아 버티며 기도하려 애써 보는 것이다. 그것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다 보면 제대로 된 핵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기도의 주체인 창조주를 만나 깊은 대화의 경험이 생기다 보면 누가 말려도 기도의 자리에 나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기도의 비밀을 발견하는 일이 문득 중요한 의무감으로 다가왔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에 익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몸 값이 똥 값이 되고, 뛰어다닐 곳이 줄어들고, 찾는 사람이 더 이상 없어지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뛰어다니지 못하고, 갈 곳이 없다면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뛰어다니고, 활동하고, 가게 하기 위해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기도할 제목은 무궁무진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원대한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기도할 때는 추상적이라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조금씩 더 구체화시켜 보면 좋다. 선교사들이 생소한 오지에서 고군분투하며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힘쓰는데, 그 생명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를 중보 하자. 정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크리스천의 의무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바통을 이어받아 삶을 이어달 내 자녀를 위한 기도는 시키지 않아도 할 기도제목임에 틀림없다. 옆집의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땅을 위해 기도하자. 함께 하는 아내와 남편의 평안을 꿈꾸고, 소속한 교회가 든든히 서기를 위해 기도하자.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이 중대한 중보의 사람이 되기 위해 새벽을 깨우는 습관을 키워나가야 한다. 육체의 근육이 나약해질수록, 기도의 근육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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