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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Nov 20. 2023

죽음을 생각하라, 오늘을 즐겨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카프레 디엠 Capre diem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
카프레 디엠 Capre diem 오늘을 즐겨라.


길에 낙엽이 구른다. 살짝 기온이 떨어지는 걸 느끼기 무섭게 영하로 달려간다. 목련나무 이파리가 하나 들 떨어지더니 온통 바닥에 쌓인 지 오래다. 목놓아 올려보던 그 아름다운 벚나무의 이파리도 땅을 뒤덮어 비에 젖어 있다.


천사 같던 벌새가 꽃술에 주둥이를 넣고 공증 부양을 하며 제자리를 날던 한여름의 기억은 과거가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들깨 씨를 심고 깻잎을 따던 아내는 추위에 동동거리며 문을 열고 집안으로 기어들기 바쁘다.


화려한 꽃이라고 표현하기가 무색하게 꽃이란 꽃이 다 떨어졌다. 나무는 풍성했던 푸른 낙엽을 한꺼번에 내려놓았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소유하기를 원하는데, 자연은 가졌던 영광을 잠깐 누린 후 다 내려놓는다.


사람이 이와 같다면 좋겠다.


더 가지려 하지 않고,

다 가지려 하지 않고,

막 가지려 하지 않고,

쉬 가지려 하지 않고

때가 되면 내려놓는 용기를 가진.


그런 사람이 멋있지 않을까?


놓지 않으려는 욕심은, 놓으면 초라해진다는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은 대개의 경우, 있지도 않은 가능성을 부풀려 자신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오는 환각이다. 이에 관한 연구 결과도 있어서 찾아봤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탐 보르코벡 (Borkovec, Ph D.) 박사 팀은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걱정거리의 79%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고,
걱정거리의 16%는 대응하여 해결할 수 있다.


전체 중 95%를 가지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이러한 100%의 걱정 중 현실이 될 확률은 그 나머지인 5%로 사람의 힘으로는 막기 힘든 일이고,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부분이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걱정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다.


두려움이라는 우상으로 둔갑시켜 맹신하며 삶을 파괴하는 종이호랑이는 결국 95%+5%=100%인 것이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가.


고민하지 말자. 고민거리가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행동하지도 말자.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쓸데없이 걱정했다 싶은 사건들이 많이 떠올릴 수 있다. 특히 자녀에 관한 기억은 그중 가장 부분이다. 하루도 쉴 날 없었던 자녀와의 관계와, 청소년기의 방황, 공부와 진로 결정, 친구 관계 때문에 애태우던 시간 등, 이제는 다 커서 이 모든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등 자기의 삶을 어엿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렇다.


그들을 키워오면서 넘은 수많은 고민의 날들이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학교로 불려 가고, 이웃집 부모에게 사과하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늦은 시간에 찾아 나서며, 자녀의 인생을 걱정했던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이제 뒤돌아 보면 참 우습게 여겨질 때가 있다.


잘 커온 것이다. 내가 걱정하며 신앙처럼 두려워하던 우상이 결코 우리를 뒤덮을 수 없다는 증거다.


일어나지도 않을 95% 때문에 시험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는 기도하자. 기도하라는 신호탄은 꼭 가까운 곳에서 쏘아 올려지는 공통성이 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
카프레 디엠 Capre diem 오늘을 즐겨라.


죽음 앞에서 장사는 없다.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만, 어차피 정해진 운명 앞에서 차라리 즐거운 삶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 카프레 디엠 Capre diem 오늘을 즐겨라./


지난해 특이한 근육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 아주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속했던 모임에서 종종 뵈었던 분이다. 이제 겨우 50 대였다. 육체가 뻣뻣하게 굳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굳는 특이한 병으로 1년 정도 앓은 분이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퇴원을 종용한 후 가정에서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돌아가셨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병원에 함께 있었던 분께 전해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동일하게 부르짖을 고백이다.


”다시 회복될 수만 있다면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요…“


우리 인생은 얼마나 축복된 시간인지, 잃어보기 전에는 잘 깨닫지 못한다. 일상이 이렇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머리가 거기에 한계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잘하고 싶어도 경험이 없거나 의지가 없어서 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인 경험과 관찰로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듣거나 책을 통해, 또는 깊은 묵상을 통해 종종 그 한계를 넘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걱정 근심, 혹은 부정적 견해로 우울하게 지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을 즐기자. 차라리 기쁨과 긍정과 친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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