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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Jan 29. 2024

최강 이삿짐

짐을 보내버렸다. 왔다 갔다 망설임의 종지부를 찍은 하나의 사건과 전말


을 보냈다. 급작스런 선택이다.


부랴부랴 해외이삿짐 회사를 찾아 단 이틀 만에 밟은 수순이었다. 거대한 컨테이너에 실려, 하나도 빼고 더한 것 없이, 집 안 밖에 있던 모든 짐을 배편으로 훌쩍 보내버렸다. 그로부터 한두 달은 되어야 도착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잠자고 나면 바뀌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 선택이었다. 


짐 중 제일 큰 문제는 얼마 전 산 최신 고용량 냉장고였다. 30리터 용량의  크고 무거운 것을 배편으로 보내는 일이 맞나 싶었다.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두 가지 이유로 결국 보내야 했다.


첫 째는 너무 좋은 제품이라 해외, 특히 캐나다에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둘 째는, 버리기에는 이 제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그래, 그럴리는 없지만, 거기 가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가져가 보자. 너무도 잘 한 선택일지도 몰라.”



겨우 한 달 전, 그때까지 망설이며 변덕을 부리던 마음을 확정하고 현재의 위치에 발 붙이고 살 판이었다.


"그래, 그냥 한국에 살자. 지방에 살면 더 좋은 것 같아. 여유롭잖아. 부모님은 지금처럼 종종 뵈러 가고, 삶의 질을 높게 유지하지 뭐... 그래, 편안한 땅에서 살아야지 어딜 갈라고."


그랬다. 그렇기에 광주로 내려오면서 입주해 2년가량 거주한 25평 아파트를 등지고 32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전 아파트처럼 연식이 오래지 않아 깨끗하고 컸다. 그래 넓고 여유롭게 사는 거야. 뒤에 산이 있고, 공기는 맑았으며, 집 앞에는 체육관이 있어 다양한 레포츠가 가능했다. 이 보다 더 좋은 환경? 아마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작고 낡은 냉장고도 버렸다. 동시에, 당대에는 최대 용량의 냉장고를 구입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크고 무거웠지만, 이런 뛰어난 무기를 하나 갖는다는 사실로 가지게 된 마음의 풍요는 컸다.



어디 냉장고뿐일까? 누구나가 한두 가지, 살아오면서 아끼는 물품에 대한 애착이 추억처럼 남아 있기도 하다. 아내는 인형이나 꽃 등의 소품을 모으고 장식한다. 어릴 적 가지지 못했던 욕구를 뒤늦게나마 채워간다. 덕분에 집은 화려하고 예쁜 티하우스가 되어 있다.


내게도 하나의 예가 있다. 중학교 때 서울 중화동에서 망우리로 매일 한 시간 반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버스 탄 기억은 없으니, 그 열악한 통학 환경에서 매일 걸어 다닌 것이 사실이다. 용돈도 없던 시절이라 버스가 있었다 해도 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걸어 통학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는 길에 교회도 지나고, 극장도 지나고, 연탄 공장도 지나면, 그곳으로 새로 이사한 학교가 아직 완전한 채비를 갖추지도 않고 학생을 맞이한 학교가 나왔다. 뭐든지 새롭다는 것은 완전하지 않아도 기분 좋은 무엇이다.


그 시절, 나는 쇠자 (steel ruler)에 애착이 꼽힌 적이 있다. 쇠로 된 자가 흔하지 않았고, 그런 것 하나 갖는 것은 내게 더욱 희귀했으므로 어느 날 우연히 주어진 쇠자를 애지 중지했다. 적당한 무게로 손에 잡히는 쇠자는 스테인리스의 광기로 반짝였기 때문에 고급스러웠다. 가방에 공간차지 전혀 없이 쏙 들어가는 느낌도 좋았다. 그 쇠자를 얼마동안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쇠자는 그런 기억 탓인지 사랑스럽다. 번듯하고 발전한 내 입지의 대명사처럼 말이다.


그런데, 비교하기가 좀 어색하지만, 이것 만큼 애착을 가졌던 것이 바로 그 가정용 초대형 냉장고였다. 그런데, 집에 겨우 안착하고 일주일 만에 해외 이삿짐으로 부쳐져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에 획을 긋는 이정표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이런 결과를 가져온 - 해외 이사의 - 배경을 밝힐 차례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우리 부부의 자세는, 전적으로 학교 공교육 신뢰의 쪽이었다. 어느 학교를 다니든 다 잘되어 있고, 어느 선생님도 다 좋은 분이라는데 이상은 없었다.


촌지가 당시 사회문제로 되어 있었고 우려의 상황을 넘고 있었지만, 그건 일부의 현상이었다. 무엇보다 참 교육 환경을 외치는 전교조 -전국 교직원 조동조합 -는 선생님들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해 주었다. 저렇게 까지 바른 교육을 위해 뭉쳤다면, 아이들 교육환경의 미래는 밝다는데 의심하지 않았다.


즉, 교육에 관해서는 지방의 학교라 해도 안심한다는 뜻이다. 자녀 교육이 이주나 이사와 관련해 무슨 이슈로 떠오는 것을 아예 가능성에서 배재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큰 아이가 1-2학년을 다닌 기간 동안 무슨 문제를 직면하거나 학교에 불려 간 일이 없는 것은 당연했었다.


두 번째 이사

이런 와중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삶의 질 향상을 목적하고 과감히 시행한 일이었다. 2년간 살던 아파트와는 크게 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아이들 학교도 그 아파트 옆에 있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학교 통학이 걸어서 겨우 5분으로 단축되었다. 학교와 집이 이렇게나 가까운 일이란, 서울 생활에서는 거의 희박에 가깝다.


광주에 오기 전 유치원에 다녔던 아들은 그 해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학교를 좋아했다. 워낙 자주 이사를 다닌 탓에, 잠재의식 속에서 생존을 위한 친구 사귐의 방식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누구와도 잘 지내는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집으로 왕래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학교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긍정적이었지만, 특히 1학년에 들어간 아들에게 대한 선생님의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다.    


선생님


아이들의 학교는 이사와 함께 바뀌었지만, 두 곳 모두에서 선생님의 태도에 의문을 품는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겐 눈에 띄었다.


한 번은 아들이 학교 숙제를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서 간 날이 있었다. 그리곤 그날 오후에 집에 와서 그 공책을 엄마에게 보여줬다. 숙제 점검을 한 선생님이 아들의 공책에 빨간 글씨로, 부모에게 도전하는 느낌으로 글을 남겼다.


"자녀 대신 글씨를 써주지 마세요!"


아들의 글씨가 작아서 마치 부모가 써준 걸로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하였지만, 마음에만 담아두고 잊어버렸다. 선생님과 부딪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1년 뒤에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런데, 두어 달 후에 영주권을 위한 추가 서류로 아이들의 재학 및 성적 증명서를 떼야할 일이 있었다. 아내가 선생님을 방문해 부탁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의 대답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몇 번에 걸쳐 방문하였으나,  오래 걸린다는 대답, 나중에 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아내는 그때마다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서류 하나 떼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데?"


"몰라, 좀 이상해. 기분 나빠."


내용을 잘 모르니 그런가 보다 하며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들렸다. 시간이 촉박해 며칠 후 내가 다시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선생님은 아내가 아닌 나를 만나자 금방 서류를 프린트해 확인을 받아 건네주었다.


서류는 윗선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로 프린트 후 담당자에게 도장을 받아 준 것 외에 없었다. 그렇다면, 아내에게는 의도적을 서류를 지체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도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또 다른 일이 생겼다. 바로 그 담임 선생님과 또 연관된 사건이었다.



엽서

얼마 후, 1학년 아들의 손에  선생님의 엽서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는 이미 영주권이 나온 뒤다. 우리는 한국에서 그냥 살기로 결정하고 , 차라리 질 높은 삶을 살자고 결정하고 있을 때다. 이사를 했고, 그 문제의 냉장고를 산 바로 며칠 후다.


엽서는 길지 않았다. 학교 통신문을 이렇게도 주나 싶게 일반 엽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내용은 아들의 행동이 이상하여 학급에 폐를 끼치니, 상담을 위해 학교를 한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들이 이상해?"


"그렇다면 선생님이 먼저 도와주거나 해결해야지 부모를 오라 가라 한다?"


"왜 학교는  오라 하지..?"


의문의 꼬리를 문 결과, 우리 부부는 몇 개월 전의 에피소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엽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내려온 아이를 통해 무리한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 많은 아이", "주의", "방문", "상담"... 바로, "촌지".



부모가 학교를 자발적으로 가는 일뿐 아니라, 선생님의 소환으로 가야 한다면 이 얼마나 미묘한 일인가. 조금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그냥 가지 않는 것이 당시의 학교 문화다. 손에 무슨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하는...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봉투"를 준비해야 하는 부담을 동반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봉투 안의 내용물이 초라하다면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그때까지 우리가 가진 상식이었다. 이러니, 학교 방문은 피하고 싶었고, 그러한 일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던 사건이었다.   


서울에 살 때도 촌지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렸기도 하고,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계동 치맛바람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활동하던 것이 썩이는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부러 학교에 가지 않았고, 스승의 날이라고 따로 챙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낯선 곳에서 엉뚱한 여 선생님으로부터 적극적인 촌지 요구를 받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깊은 실망감이 확대되어, 우리 형편에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기는 불가능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삿짐은 그렇게 급하게 부쳐지게 되었다. 더 이상 마음을 바꿔도 소용이 없게 아예 봉해버린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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