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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Jan 17. 2024

예행연습

잣대를 갖다 대어 보았지, 지방 이주가 해외 이민 비교해 짧지만 넉넉해

발령, 적응, 사람들


어느 해, 회사 영업부의 지방 사무소로 내려갈 기회가 생겼다. 장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 충청, 전라, 경상도의 6곳 사무소 대구와 광주 두 곳이 대상이었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큰 고민 없이 광주를 선택한 배경에는 친가의 가족과 어른들이 대구에 많이 계시기 때문이다. 신혼집 열악한 환경의 몇 가지 사건들을 겪은 뒤라 지방 사무소에서 까지 친척 어른을 모셔야 하는 경우가 생길까 우려되어서다.


이민을 이미 신청까지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내 삶의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이별은 이미 각오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지방으로의 이전은 이별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기로 보여주게 되었다. 거리상으로는 겨우 서울에서 광주로 옮기는 일이었다. 언어와 만나는 사람도 동일한 한국적 문화 공간에서 일어나는 잠시의 변화였지만, 직장, 학교, 문화, 환경이 급격히 바뀌게 된다는 입장에서는 이민과 다를 것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예행연습으로 좋은 기회였다.


신혼집 2층 빌라 이후 장만한 금쪽같은 중계동 13평 아파트를 팔아야 했다. 그나마 그 집을 소유하고 있던 2-3년 동안 조금 올랐으나, 집 살 때 꾼 빚 갚고 나면 몇 푼 되지 않아 사실 빈손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근무할 곳에도 집은 필요했고,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거처를 얻는데 재융자가 가능했다. 그렇게 타 지역으로 완전한 이사를 했다.


지방으로의 이전으로 정신적인 회복이 있었다. 이곳 삶은 서울에서와는 확연히 달랐다. 명칭은 서울과 동일한 대도시지만 일상이 빡빡하지 않았다. 사람 간의 정이 있었고 관계의 여유 공간이 훨씬 많았다.


한편,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갈 수 있어 좋은 면이 있었음에도, 매주 한 번은 부모님을 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없던 부담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등 붙이고 안식을 누리기보다 서울로 1박 2일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일상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관계는 조금씩 나아졌다. 자연스러운 마음의 치유가 아내에게 가능했고, 부모님 역시 자식과 며느리에 대한 소중함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지만, 어쨌거나 자식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으로 생겼을 부모님이 슬픔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민과 닮은 꼴이 지방 이전이다. 굳이 따진다면, 작은 이민이다. 곧 현실화될 캐나다로의 완전한 이주와 몇 가지 면에서 닮았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어느 정도 겪어야 했던 면에서 동일했던 것이 첫 번째다.



이웃 스토리 - Amway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는, 그곳 문화와 환경에의 적응을 위해 새로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학교와 친구관계에 익숙해져야 하고, 어색한 사투리에도 외국어 대하듯 적응도 필요하다. 언어의 문제를 제일 큰 축으로 보는 것이 해외이주라면 같은 나라에서 움직이는 이 정도의 적응은 쉬운 편이다. 어딜 가도 같은 언어가 소통되는 것만큼 적응에 대한 숙제를 쉽게 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외에 또 다른 문제가 학교와 친구관계로, 그 환경과 상황이 주는 특수한 면이 있다. 부모는 학교만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자녀들이 잘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사실,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인데, 이곳의 학교와 학생들은 서울에서 온 아이들을 달갑지 않게 보았던 것 같다. 친절과 거리가 멀었는지 친구가 없었다. 딸의 경우, 유일하게 한 명의 친구와 종종 서로의 집에도 놀러 갈 것 외에 별다른 친구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겨우 들어간 아들에게 학교는 힘든 구역이었다. 무엇보다 친구를 잘 만들 수 있게 중간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선생님의 불친절한 접근으로 아들은 우울한 학교생활을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었고, 결국 이에서 촉발한 간접적 촌지 요구 사건이 망설이던 이민의 최후 결정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지방에서의 정착이 절대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또 어른인 우리는 또 적응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겪을 일이지만, 입주한 아파트의 문화는 많은 부분 삶의 편리와 불편을 가름한다.


한 번은 옆집에 사는 이웃의 적극적인 친화 노력으로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차 한 잔 정도 하며 집으로 초대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그 이웃은 어떤 좋은 생활 용품을 소개해 주었는데, 암웨이라는 다단계 판매 제품이었다. 거절하면 관계가 불편할 것 같아 회원 가입과 제품 구매에 수긍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이전에 암웨이에 대한 서글픈 사연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다단계 활동에 거부하지 못한 아내의 눈물겨운 판매 노력이 처가 쪽 식구들과 불편한 관계까지 갔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암웨이 다단계에 빠지셨다. 어느 여자 부동산 중개인과 가까이 지내시다가 하부 조직원으로 가입하셨고, 없는 돈을 끌어 제품을 많이 사셨다. 부모님 댁 방 한쪽에는 비누며, 세제, 치약류로부터 약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이 쌓여있었다. 작은 아버지와 숙모는 물론, 아내도 시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저장해 놓은  물건을 돈을 주고 사지는 않았지만, 제품을 팔아드려야 했다.


아내는 그날로부터 외판원이 되어 잠실에서 언니 오빠가 사는 방이동으로, 구의동으로, 화남으로, 수원으로 차에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다녔다. 매번 식사를 사주며, 개인적인 열정도 없이 낯간지러운 부탁을 해야 했다. 물건은 몇 개씩 마지못해 사주기는 했지만 더는 부탁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 한 번으로 기족에 대한 모두 끝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측은 했던 언니 한 둘이 나중에도 덤으로 더 사주기는 했지만, 가족에게서 친구로, 친구에게서 교회로 퍼져나가야 마땅할 만큼 집에 쌓인 물건이 과다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심하게 되었다.


광주에 내려와서까지 그 일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나의 일이 더 바쁘게 되면서 서울행 주말여행이 자연스럽게 사라져 간 것이, 돈만 쓰고 돌아오는 것 없던 다단계 하수인의 종말이다.


옆집에 살던 이웃 남자는 대학교수라고 소개했다. 성격이 워낙 붙임성이 있어, 암웨이를 해서 이렇게 친절한지, 친절이 지나쳐 암웨이가 적성에 맞았는지, 아니면 성격은 안 좋은데 암웨이를 해서 좋아진 건지, 성격이 좋은데 암웨이는 그 기질을 더 살려준 건지 모르겠지만, 적극적이고 기분 나쁘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있던 나쁜 경험은 암웨이 자체의 'A"자도 싫었기 때문에 차가운 거절에 도움이 되었다.



이웃 스토리 - 반상회


서울의 중계동 아파트는 24개 동 까지 있는 대단위 단지에 있었다. 각 동에 130여 세대가 살고 있어 전체로 보면 3000 세대가 넘는 거대 주거지역이었다. 반상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으나, 많은 입주자는 무관심한 것이 일종의 문화였다. 자기 일에 분주해 다른 곳에 눈 돌리기 싫은 대도시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에 반해, 광주는 대도시임에도 사람 사는 맛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중 아파트의 반상회가 침목회 형식으로 발전해, 모이는 날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의제 토론보다 기다려지는 시간인 것 같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파트 단지가 서울처럼 거대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삶이 여유롭고 덜 빡빡하여, 사람다운 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반상회 날 모이는 집에서는 잔치 분위기를 느낄 만큼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무겁지 않지만 음식을 마련했고, 오는 사람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회의는 애피타이저였고, 본 메뉴는 식사였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는 까닭에 술이 항상 모임 마지막 부분에 마련된 이 문화가 맞지 않았다. 결국, 한두 번 참석 후 안 나가게 되었다. 그 지역 출신도 아니라는 사실이 소속감을 더 낮추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웃은 종종 안부를 주었고, 간혹은 음식을 챙겨주어서 미안한 마음을 더하게 했다.

 


교회와 구역


이주를 한다 해도 참석할 교회를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은 우리에게 필수 요건이다. 이곳에 올 때도 그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사를 가던지 아주 멀리 이주를 하던지에 상관없이, 가족이 다른 곳으로 살 곳을 옮겨 간다면 반드시 근처 환경을 미리 둘러보아야 한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갈 때는 답사를 먼저 할 수가 없었다. 발령의 결정이 너무 빠르게 되었다. 내려가는 날짜를 맞추기도 급박해서 지방사무소에서 미리 정해준 장소로 곧장 이삿짐과 함께 내려왔다. 그런데, 고맙게도 교회는 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에는 교회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교회인지 혹은 덜 좋은 교회인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교회는 근처에 많았기 때문에 마음의 결정만 하면 되었다. 최악의 경우, 한두 번씩 참석해 보고 차후에 선택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건물이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곳 전체 주민들이 그렇듯이 매우 정겹고 따뜻했다. 나와 아내는 주일이면 성가대를 섰기 때문에 친교나 만남의 모든 활동이 성가대 위주로 행해졌다. 따라서 지역별 모임인 구역에는 자연히 소원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구역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에게 주로 연락했다. 처음 몇 번의 나갔지만, 필요를 크게 못 느낀 나머지 참석을 중단했는데, 아내가 함께 참석해야 할 나의 퇴근 시간이 늘 늦거나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내 편에서 먼저 이 모임을 피하게 된 근본 이유는 연령차가 많이 나서였다.  




작은 이민으로서의 지방 이전이 가져온 두 번째 변화는 개척이라는 미션이었다. 이민자에게 주어지는 우선적인 업무는 완전히 다른 삶의 개척이라면, 지방사무소가 존재하게 된 원래의 목적을 불철주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지방에서의 삶을 '개척'이라고 명칭 하는 데는 의미가 있다. 거점 지역이 광주이지만 활동 구역은 전라 남북도 전체다. 앉아 있어도 필요한 회사나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구입을 의뢰해 오지만, 슈퍼컴퓨터는 훈련된 영업사원이 최고 결정권자를 찾아 구워삶는 역할이 필요했다. 광주에서 익산으로, 군산으로, 목포로, 나주로, 여수로, 전주로 쉼 없이 다녀야 했다. 있는 고객 잘 관리하고, 없던 고객 새로 창출해야 하는 일 역시 '개척'이다.


그곳에 있던 3년 동안 나의 삶은 개척이라는 숙제로 거의 황폐하고 말았다. 일상이 된 늦은 퇴근과 야근, 고객과 내부의 끊임없는 술자리, 그리고 밤늦어서야 집으로 오던 고속도로에서의 일상화되었던 졸음운전은 아찔한 순간을 많이도 만들었다. 결국 나는 지방간과 고지혈의 진단을 받고 건강에 적신호를 켜야만 했다. 이민 후에 들은 소식으로, 회사의 동료 중 너덧  명이 이 고지혈과 지방간의 악화로 유명을 달리했다. 회사원으로 일상화된 음주와 과로가 불러오는 이 두 가지 증상은 무시무시한 간경화와 간암의 초기 신호인 것을 많이들 무시하고 지나가곤 했다. 어쩌면 나는


씨는 좋은 땅에 뿌려야 한다. 가시밭이나 돌길에서는 개척이 쉽지가 않다. 개척은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이 더 중요하다. 때에 맞는 비가 오고, 적당한 햇살과 그늘이 비추는 것은 노력과는 크게 상관없다. 그럼에도 시와 때를 맞추며 인간의 지혜를 활용할 때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의 개척은 어느 순간 미궁에 빠진 미스터리 처럼 되고 말았다. 과로와 술에 찌든 얼굴은 있었으나, 회사가 요구하는 결과엔 부족했다. 지나치게 다녔고, 정신은 지나치게 분산되었으며, 몸은 지나치게 지쳐버렸고, 땅은 지나치리 만큼 불모였다.


마찬 가지로, 이민의 삶이 뿌리내릴 토양이 과연 옥토인지 돌길인지 이민을 가서 살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부터 얼마만큼의 햇살과 토양, 그리고 나의 노력이 외부적인 햇살과 적당한 바람에 어떻게 배합될지를 미리 알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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