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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May 10. 2017

하루

사무엘상 1:1-9

2014.10.16 마커스 목요예배 김남국 목사님 설교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모세의 출생을 성경에서는 "레위 가죽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 2:1-2)"라고 표현되어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무엘의 출생을 설명하기 전에, 성경은 사무엘의 가정이 어떤 집인지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무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었는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어떠한 사람인지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엘가나와 한나가 매년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던 시절은,  

 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던 시대.

 2. 제사장으로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 그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봇하더라(사무엘상 2:12)".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제사장으로 성소에서 섬기고 있던 시대.

 3. "한나" = "은총"이라는 뜻. 그러나 한나는 자식이 없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의 표현으로 그 시대에는 이해되었지만, "은총"이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는 한나는 자식이 없었고,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인 브닌나는 항상 한나를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였다.


이런 시대 상황과 상관없이, 엘가나의 가정과 한나는 그 끔찍한 시대에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가정이었다. 

"은총"의 기준. 세상 기준이 아닌 말씀이 기준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세상 기준의 복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타락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것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심어진 나무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세상의 평안과 세상의 행복이라면, 우리에게 있는 고난과 어려움은 원망 거리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고난과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이 고난의 시대 가운데 한나가 한 일은, 매일 매년 하나님께 나아오는 그 자리를 지킨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루의 싸움이다. 하루가 모여 삶이 되고, 삶이 모여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벽돌 한 장은, 어떤 집이 될지 모른다. 그 집의 모양은,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아신다. 

신앙생활은, 이 자리에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기에 나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삶인가? 나의 오늘 하루의 삶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인가?

직업을 갖지 않고 "생산성"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하루,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하루하루 방황하며 살아가는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내가 지금껏 내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일"을 했고, 일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느냐,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공동체 모임을 하는 것과 지역교회에서의 여러 가지 모습의 섬김 또한 내 삶의 가치를 판단해주는 "일"에 포함되기도 한다.) 혹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얼마나 시간을 사용하여 "공부"하거나 노력했느냐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기준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기준일까?

세월을 아끼라 하셨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셨지만, 그것이 내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신 적은 없는 거 같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덴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131)"

이 말씀이 살아서 내 삶으로 표현되어지는 과정 가운데 있다. 머리로 이해되던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오고, 삶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나의 가치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만 판단된다.

나의 정체성도 오직 예수의 십자가 은혜받은 자로만 정의되어진다.

나의 삶을, 나의 정체성을,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 그 어떠한 다른 기준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맺게 하실 열매는 성령의 열매일 것이다. 세상의 열매가 아닌. 


오늘 하루, 하나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 

오늘 하루가 어떠한 집의 모양을 세우는 벽돌이 될지 나는 모르지만, 오늘 이 자리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의심되고, 두렵고, 막막하고, 불안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러한 내 모습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나의 하루가 "생산성"을 따지자면 별 볼 일 없는 하루일지 모르겠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렸다면, 그러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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