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 주신 십자가 은혜
엄청난 큰 착각을 하고 살고 있었다.
이 착각이 지금까지 지속되기까지의 그 원인은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그중 하나를 굳이 꼽아보자면,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것은, 은혜를 입었던 까치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 머리가 깨져 죽기까지 종을 쳤다는 것이었다.
죽기까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교훈은 나의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다.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잠재의식 가운데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에게 선의를 베풀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 때문에, 누군가에게 무엇을 쉽게 부탁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대가 없이 선의을 보이는 사람에게 조차 나도 모르게 벽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보은"에 대한 의무감과 부담감은, 사람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어쩌면, 예수님 그 십자가 은혜를 갚는 데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라는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사랑"보다 "보은"의 의미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갚아지지 않았고, 힘들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 은혜를 갚는 것이 힘들고 무겁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은혜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이 될 거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무게가 무겁다는 느낌이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첫째, 그 은혜는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둘째, 죄 지어 타락한 피조물 인간이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저 주신 십자가 은혜"라고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믿고 있었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의 죄까지 예수님을 통해 대속시키셨다는 것.
그 은혜는, 그 죄 없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 은혜는,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나에게는 그것을 갚을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없다.
나는 내 인생을 통해 갚으려 했는데, 그 인생 또한 내 것이 아닌데 어찌 내 것 아닌 것으로 갚아 가겠는가.
만약에 설령 그것을 갚을 수 있는 어떠한 것이 나에게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은혜를 갚기 위해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 받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랑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 건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사랑을 진짜로 알고 있진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분의 사랑의 백만분의 일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랑이 깨달아졌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았겠지.
"사랑해서"라는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깨달아 지기 전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그분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지지 않았다.
십자가가 어떻게 가벼울 수 있을까.
이제 조금씩 머리가 아닌 가슴과 삶으로 알아가 지고 있다.
책임과 의무감이 아닌 사랑 때문이라는 것.
사랑 때문에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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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끌툰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오는 만화들을 보면, 작가님들의 깊은 묵상과 삶의 경험들에서 깨달아진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 며칠 전에 "예수님의 연애편지 - 나귀의 경주"편을 보았다.
만화를 보다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었던 거 같다.
"이런 못난 저라서 죄송해요, 제게 많이 실망하셨죠? 정말 제게 실망하지 않을 셨어요?"라고 말하는 나귀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아니~ 전혀~ 오히려 기쁘구나. 실망이라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와 함께 하자 말해주니 오히려 기쁘구나. 그리도 나귀야 너는, 원래 못난 나귀란다~"
못난 나귀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지만, 자신이 못난 걸 깨닫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데, 그 고백을 기쁘다 하신다.
그 사랑을 받은 나귀는 기꺼이 멍에를 짊어진다.
그리고 그 멍에는 가볍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어보셨다.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걸 미리 이야기하셨을까.
만약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신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숨기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 죄책감에 사로 잡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도망 다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시고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깊고 넓은 조건 없으신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며칠전 마가목음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오병이어 기적 사건 기록 전에 아주 짧게 나와 있는 이야기가 내 마음에 와서 박혔다.
마가복음 6장 30-31절
사도들이 주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잠깐 쉬어라"
예수님은 사도들이 자랑스럽게 예수님께 나누고 싶어 하는 그들이 행한 일과 가르친 것들 보다, 제자들에게 더 관심이 있으셨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이 관심인는 "나"로 그분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내가 한 무언가"를 갖고 다가가려고 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사랑받는 대상이었다.
사랑받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때 예수님을 부인하지만,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분이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깨닫고, 돌변한다.
죽기까지 그 복음을 전한다.
사도들에게 그 멍에는 가벼웠을 것이다.
은혜 갚은 까치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살려준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다시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며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이, 까치를 행복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배은망덕한 본능이 있는 악한 사람이라, 모르겠다. 은혜에 감사하는 것 만으로 은혜를 갚아나가는 삶을 행복해하며 살 수 있을지. 못 할 것이다. 평생 빚을 떠안고 살아가는, 대출을 갚아야 하는 자유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사랑"마저도 갚아야 하는 부담되는 "빚"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죽기 까지 충성하시고 성육신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함께하심으로 그 사랑이 점점 더 마음으로 깨달아진다면.
그 사랑을 진짜 누리기 시작 한다면.
그렇다면 행복하게, 가볍게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