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듯 함께한 사람들도 있고, 잊지 못할 기쁨과 추억을, 또는 잊고 싶은 후회와 상처를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흘러.
소중한 추억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참 감사하고 기쁜 일인 것 같습니다.
거의 십 년이 다 돼가는군요.
북경에서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나이는 다 다르지만, 국어사전에서 "친구"의 첫 번째 의미인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말에 부합한 "친구"이지요. )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냥 오랜만에 잠깐 만나 밥 한 끼 먹고 얼굴 보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같은 책을 읽고 나눔을 하기로 했지요.
<<라틴어 수업>>
이 책으로 그 첫 번째 만남을 열기로 했습니다.
독서모임을 하며 함께 읽을 책을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정말 많은 종류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을 뽑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인문학으로 시작하기로 하고, 최근 인문학 베스트셀러 중 하나를 골랐지요.
이 책은 서강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하시던 "한동일" 작가님께서 쓰신 책입니다.
책 초반에는 여러 주제와 함께 관련된 라틴어 문법을 함께 설명해 주시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너무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새로운 언어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을 떨치고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차피 이 책이 쓰인 목적 또한 라틴어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반부부터는 단순히 언어의 문법적 설명들보다는 인생에 관해 생각할 만한 질문들이 점점 풍성해집니다.
책을 읽는 동안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기도 하고, 한숨에 대답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질문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지금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등부는 중국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끔 투덜대며 질문하기도 합니다.
중국어 배워도 별로 쓸데도 없는 것 같다고.
중국어뿐만 아니라 지금 배우고 있는 많은 부분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이 아닌, 단순 투덜거림의 하소연이었기 때문에 뭐라 정확히 말해주지 못했지만, 제 마음속에 있던 희미한 답을 이 책을 통해 선명하게 발견했습니다.
언어 학습뿐만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지금 모두 사용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이미 잊혀 버린 지 오래된 것만 같은 지식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그 "앎"을 얻기까지 하는 그 노력들이 모여, "삶"을 살아가는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분께서 이러한 예화를 들어 어떤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명의 대가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1+1=2를 설명하기 위해, 한 사람은 오렌지를 사용하였고, 한 사람은 바나나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렌지 하나 + 오렌지 하나 = 오렌지 2개
바나나 하나 + 바나나 하나 = 바나나 2개
두 대가는 모두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1+1=2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각자 다르게 표현했지만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서로 마음도 통했겠지요.
그러나, 대가의 제자들끼리 싸움이 났습니다.
한쪽에서는 "오렌지야!!!"라고, 한쪽에서는 "바나나야!!" 라며 싸움이 난 것이지요.
오렌지와 바나나는 단순히 1+1=2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빠는 가방 끈 긴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서비스업종에 평생을 종사하시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가방 끈 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겠지요.
(물론, 모든 "가방 끈 긴 사람들"이 그렇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항상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배울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내가 배운 것 만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주위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인지 자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비 전문가가 내가 전공하는 전문 분야에 대해 잘못 알고 있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을 때, 그것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모든 것인 것처럼 그것만을 고집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거나,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찮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겠지요.
내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것들이 나의 사고를 점점 편협하게 가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직되고 닫힌 사고의 실타래를 좀 더 유연하게 풀어주길.
그리고, 나 자신 한 사람을 넘어서 더불어 가는 삶 가운데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하길 원합니다.
저는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모임 가운데 그 기쁨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내가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을 서로 나누며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좋았던 것은, 그렇게 서로 나누며 서로를 더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결혼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가 결혼 후에 깨달은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함께 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불편함을 뛰어넘는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뿐만 아닌, 많은 관계 가운데 다 그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사랑은 남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린도 전서 13:8)"
내가 배우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생 동안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나를 더 알아가고 이웃을 더 알아가는, 나의 사고의 틀을 넓혀주는 도구가 되길.
그래서 함께 더불어 가는 이 세상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주길.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