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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hna Apr 22. 2020

수학 사색_04

04. 개념을 어떻게 익혀야 하는가

나는 가르치는 학생들과 같이 즐기기 위해 보드게임을 종종 구입하곤 한다. 10년 정도 사모았기 때문에 이제는 왠만한 보드게임방과 비슷할 정도로 보드게임이 구비되어 있긴 하는데, 사실 그 중에 몇개는 한번도 해보지 못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규칙이 너무 어려워서


였다...


그래, 모든 보드게임에는 룰, 즉 게임을 즐기기 위한 규칙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규칙을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은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게임 구매시에는 연령제한을 잘 봐야 한다.


아니,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사실 이거다.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수학은 개념이 중요하다


라고 말을 하긴 하는데, 수학에서의 개념이 왜 중요한가 를 말하고 싶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한참 길어지지만, 깔끔하게 한마디의 비유로 얘기하자면, 바로 이거다.


수학의 개념은 보드게임의 규칙과 같다.


물론 좀 더 수학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간다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입시수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학의 개념은 퍼즐의 규칙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루미큐브라는 보드게임을 보도록 하자. 이 게임의 승리조건은 자신이 가진 패를 모두 내려놓으면 되는 것인데, 내려놓기 위해서는 3개 이상으로 이루어진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어떤 것이 조합으로 인정되는지는 각자 찾아보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이 보드게임의 규칙을 모르고 이 게임을 즐기려고 한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패만 받고 멍하니 있다가 거의 하나도 내지 못 하고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규칙을 다 이해했다고 해서 이 게임을 항상 이길 수 있을까? 이 규칙내에서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전략을 짜내야 하고 이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이길까 말까 하니까.


즉, 수학에서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딱 이 정도 느낌이다. 보드게임을 하기 위한 규칙. 그 규칙을 모르면 게임 자체를 즐길 수 없고, 그 규칙을 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규칙내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학에서의 개념이 덜 중요해 지는가? 오히려 수학에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자격에 가깝지 않을까. 이 개념이 서있지 않으면 애초에 수학을 즐길 수 조차 없기 때문에 수학에서의 개념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수학의 개념을 공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선생님의 설명을 듣거나, 인터넷 강의를 보거나, 수학개념서를 읽거나 하지 않을까. 사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크게 문제는 없다. 자기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될 뿐. 그런데 문제를 풀려고 하면, 그냥 기초문제들은 쉽게 풀리지만, 약간만 복잡해 져도 쉽게 풀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 이때부터가 문제이다.


주입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냥 문제풀이를 외운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는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약간 더 현명한 아이들은 스스로 개념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수학의 개념을 다시 공부하고자 하는데, 이때 개념서를 다시 한번 읽거나,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좀 더 좋은 개념서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걸 찾아다니거나, 돌고 돌아 교과서가 최고의 개념서라고 하면서 교과서만 20번씩 보는 경우도 봤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는냐 하면, 최소한 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수학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 중 검류혼 작가의 <비뢰도> 16권의 한 장면을 인용해 보겠다.


검후가 다시 말했다.
“그럼 너의 무기를 꺼내 들어라!”
“저의 무기라면 굳이 꺼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깐요.”
“호오?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너의 마음이 그것들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저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함께 움직입니다. 그것은 저의 손발과 마찬가집니다.”


이 인용문의 마지막에 주인공 비류연의 대사가 개념을 어느 정도까지 익혀야 하는가 에 대한 내 생각이다. 보통 우리가 수학의 개념을 공부할 때, 한번 공부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 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아도 다 이해했다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자신의 머리를 한탄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려고 해도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려운 문제를 마주치면, 도대체 내가 배운 개념과 이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모른채,


개념,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상태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수학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설익은 상태가 아니라, 전 단원의 모든 개념이 언제 어느 문제에 대해서든 필요할 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수학의 개념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대한 개념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용대운 작가님의 <태극문>이라는 무협소설을 인용해 보겠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육합권이나 복마검법 같은 보잘 것 없는 무공으로 절정고수들을 가볍게 물리치는 것을 보고 그가 숨기고 있는 절학을 펼치면 얼마나 위력이 가공할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하나 그에게 숨기고 있는 절학 따위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은 육합권과 복마검법을 비롯한 열가지 무공이 전부였다. 그 열가지 무공을 익힌 사람은 무림에서 쓸어다 버릴 정도로 많았다. 단지 다른 것은 위지독고는 그 무공들을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익혔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위지독고의 비밀이었다. 완벽한 무공! 위지독고의 무공은 완벽했다. 그가 시전하는 초식 하나하나는 아무런 허점도 없었다. 때문에 시시한 육합권으로도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합권을 익힌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없었다.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무공이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없다. 사람인 이상 완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보잘 것 없는 무공들로 어떻게 강호의 최고절학들을 격파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 하나 그들이 사실을 알았다면 너무나 단순해서 깜짝 놀랐을 것이다. 위지독고의 무공은 완벽했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무공은 어딘가에 크고 작은 허점들이 있었다. 완벽한 무공과 그렇지 못 한 무공이 격돌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속이 꽉찬 단단한 바윗덩어리와 속이 텅텅 빈 바가지가 부딪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가지는 부딪치는 즉시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위지독고와 싸우는 상대들도 바가지처럼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수학에 대한 공부법을 이야기하면서 왜 무협소설의 예시를 드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을 도구로 쓰기 마련이라고 변명해 보겠다. 흠, 이거 저작권에 안 걸리나? 혹시 문제가 된다면 삭제해야 겠다. 참고로 위에 인용한 무협소설들은 매우 재밌다. <비뢰도>는 작가가 연재중단을 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태극문>이란 소설은 짧고,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매우 많은 책이다. 이렇게 광고를 하면서 죄책감이 좀 가벼워지길 바래본다.


나는 수학에서의 많은 공식들을 무협소설에서의 신공절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무공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무공. 그 안에는 엄청나고 신기한 묘리가 숨겨져 있어서 익히는 것도 쉽지 않은 그런 무공. 아니면 마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에 대한 제대로 된 깨달음이 있어야만 나오는 강기를 깨달음 없이도 억지로 만드는, 그런 무공 말이다.


왜냐하면, 공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많은 수학적 깨달음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그 수학적 깨달음이 없이 공식만 갖고서는 그 위력을 제대로 낼 수 없다. 공식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이라고 하는 것을 쓰면, 이차방정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초등학생 조차도 모든 이차방정식의 근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보면 딱 무협소설에 나오는 마공이라는 비유가 적합한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노력일까.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알고 써먹을 수 있다고 해서 이차방정식 문제들을 다 풀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불가능하다. 실제로 수학 문제들의 구성을 보면,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써서 풀 수 있는 문제들은 기초문제에 한정된다. 중간 난이도 이상의 문제들은 근의 공식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반사항들을 다 이해하고 있거나, 근의 공식의 중간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만 풀 수 있다.


그런데 그 중간과정을 이해하는데, 수학의 개념들은 너무나 수학적인 용어로 쓰여져 있다. 물론 그 수학적인 용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용어자체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개념을 문자적인 형태로만 외우고, 실제로 써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수학적인 개념을 수학적인 용어의 나열이 아니라,


최대한 알기 쉽고, 간단하게, 한마디로


익히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말하면 감이 안 올 것 같아서, 예시를 들어보자.


수학에서 소수의 정의는 1과 자기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이다. 예를 들어 5의 약수는 1, 5 인데 5는 1 과 자기자신인 5만을 약수로 갖고 있으니까 소수라는 말이다. 반대로 6의 약수는 1, 2, 3, 6 인데 1과 자기자신 이외의 약수가 있기 때문에 6은 소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정의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약수라는 것을 구할 수 있다면,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뭐랄까, 그냥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소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영어로 된 야설을 읽다가 소수가 영어로는 the prime number 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왜 야설에 소수라는 것이 나왔는지는 묻지 말도록 하자. 흠흠.


소수, the prime number, 즉 가장 중요한 수라는 말이다. 그때부터 내 철학적 사색이 빛을 발했다. 수 중에 중요도가 따로 있나? 중요한 숫자가 있다면, 중요하지 않은 숫자도 있다는 말 아닌가, 중요하다면 왜 중요한 거지, 라는 생각 등등이었다.


그리고 소수라는 것 자체만으로는 제대로 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자, 그 반대라고 불리우는 합성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합성수라고 하는 것은 한자로 된 이름으로도 의미가 명확하다. 합성된 숫자라는 의미일테니까. 그 관점에서 보자면, 6 이라고 하는 것은 2와 3의 곱으로 합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 6은 합성수라고 볼 수 있겠다.


12는 2와 6의 곱, 혹은 3과 4의 곱으로 표현될 수 있을테니 12도 합성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수라고 했던 5 는 어떠했던가. 5 는 1과 5의 곱 외에는 불가능했다. 만약 1과의 곱으로 분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수는 합성수가 되어버릴테니, 1과의 곱을 제외한다면, 5는 분해가 되지 않는 수였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 5는 곱셈으로는 분해가 불가능한 수였고, 다른 소수인 3이나 7도 곱셈으로는 분해가 불가능한 수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모든 수는 1과 자기자신만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약수 자체가 1과 자기자신 밖에 없는 거고.


이렇게 생각해 보니, 소수라는 정의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분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지, 1과 자기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분해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인가 에 대한 의문은 화학의 원소라는 용어를 보고 생각해 보았다.


아주 예전의 과학자, 아니 철학자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들은 만물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며 사고실험을 했었다. 만물을 쪼갤 수 있는 부분까지 무한대로 쪼개다 보면, 더이상 쪼갤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라는 의견과 계속 쪼개다 보면 그냥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라는 의견, 크게 보면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었겠지. 그리고 화학에서는 그렇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것들의 이름을 원소라고 붙였다. 물론 실제로는 더 쪼갤 수 있었지만, 일단 그 당시의 인식은 그랬다는 말이다.


수학에서 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수를 소수라고 이름 붙이고 가장 중요한 수라고 생각했겠는가. 아마도 수학자들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이 숫자들이 모든 수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소수의 정의를 1과 자기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라고 외우지 않고,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한 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면 분해가 불가능한 소수, 분해가 가능한 합성수 이렇게 딱 떨어지니까.


뭐, 1은 소수도 아니고 합성수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만, 여기서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수학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받아들이기 쉽게 자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문제를 본다면 조금 더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소수를 1과 자기자신만을 약수로 갖는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이해하려는 것과, 분해가 불가능한 수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다르다. 아이들에게 가르쳐 봤을 때, 후자가 문제에 좀 더 손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확인했다.


이렇듯 수학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쉽게 써먹을 수 있게 가장 쉬운 말로 익히는 것이 좋다. 수학에서는 무언가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어디에 무언가를 적용해야 할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개념에 대한 바탕을 제대로 이해하고, 각 공식들이 어떤 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때, 공식을 적절하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체감할 수 없다면, 많은 지식은 오히려 독에 가깝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학교 수학에서는 구의 겉넓이와 부피를 구하는 공식은 외울 수 밖에 없지만, 그 외의 공식들은 사실 외우지 않아도 상관 없다. 대부분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공식이 아니라 등식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수학이 그렇게 대충이야!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이건 좀 대충이긴 하지. 하지만 좀 대충이더라도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저렇게 대충이어야만 문제에 적용해서 실제 써먹기 쉽다는 것이다. 너무 어렵게 공부해 놓으면 문제에 적용하기도 힘들지만, 쉬운 말로 대충 이해해 놓으면 조금 틀릴지라도 문제에 적용하기 쉽다.


그렇게 하다 틀리면 어떻게 하냐고? 연습할 때 틀리는 건 시행착오에 불과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실제 문제에 적용시켜 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도 문제에 적용하면서 자꾸 내가 정해놓은 대충인 정의에 대해 계속 곱씹으면서 이게 아닌가, 계속 고민해 가면서 완성시켜 나갔다. 그 쉬운 한마디로 모든 문제에 적용해서 푸는데 문제가 없는지 다 실험해 보고, 그것이 모든 문제에 적용가능함을 확신하고 나서야 이 단순한 정의로 가도 문제없다고 느꼈다.


그 시점이 되면, 수학적인 정의조차도 이미 충분히 이해할만큼 성장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자 그대로의 정의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필요할 때 쓸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래 이 글의 기본은 10년전 쯤에 완성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 쓴 글은 소수에 대한 예시가 아니라 항등원과 역원에 대한 예시를 썼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항등원과 역원이 사라져서 그러한 예시를 드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소수에 대한 예시로 바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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