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rishna Apr 08. 2020

사이드 스토리_04

04. 소년이 본고사 시험장에 이르기까지

대략 열흘간의 주지육림의 생활 끝에, 소년은 몸을 추스려 서울로 떠났습니다. 대학교 본고사를 보기 바로 전날에 있던 예비소집에 참석을 하고자 했으니까요. 소집행사 바로 전에 작은 아버지가 서울에 와서 시험보는 것이 기특하다며 명동에서 아주 유명한 냉면집을 데려가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의 소년은 스스로도 잘 몰랐지만, 메밀 알러지였습니다. 소년은 냉면을 매우 좋아했었는데, 검은 면이 들어있는 냉면을 먹으면 급격히 어지러워지고, 온몸에 열과 두드러기가 나서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토하고 쓰러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알러지가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래서 그것은 그저 상한 냉면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것이라며, 끊임없이 냉면에 대해 도전을 했었던 것이랍니다.


뭐, 이건 사족이긴 한데, 알고보니 소년의 몸엔 메밀 알러지 뿐만 아니라, 한랭 알러지가 있어서 체온을 잃으면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고, 더운 곳에 가면 목 밑이 발적하는 알러지도 있었지만, 소년은 군대에 가기 전까진 그것이 알러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답니다. 그냥 몸이 좀 근지러워진 것이니까 안 긁으면 됨이라고 생각할 뿐이었죠.


작은 아버지가 사주신 그 냉면은 참으로 맛있었고, 식사를 마치고 나와 가족과 헤어지고 종로에서 대학교까지 홀로 이동을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쓰러질 뻔 했으며, 속이 미식거려 토할 것 같고, 온몸이 발적하고 간지러워졌습니다. 소년은 그제서야,


아, 이거 또 식중독이네.


라고 생각하며, 혼미한 정신인 채로 예비소집장소에 갔습니다. 그곳엔 소년의 고등학교 친구들도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소년의 맛간 모습을 보고,


야, 너 왜 그래?


라고 걱정해 주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2년 동안 기숙사에서 윗 침대를 썼던 고 모군은,


내년에 재수하면, 엿 사줄게.


라고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간디에 버금가는 비폭력주의자이기도 했지만, 고 모군을 몇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사실 당시에 서있기도 힘들었던 상태여서 당장 다음 날에 있을 중요한 본고사 시험을 볼 수 있을지 위기의 상황이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뭐,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입학시험 전날에도 부모님의 부부싸움 때문에 밤 새고 시험 보러 간 적도 있던 터라, 이 정도로는 아직 소년의 멘탈을 흔들긴 무리였겠죠.


다행히 선배들의 도움으로 의무실에서 주사 한대 맞고 나서 좀 멀쩡해진 소년은 2박을 할 대학교 기숙사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본고사 시험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지방학생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를 개방해 주었기 때문에 시험 보는 기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 기숙사에서는 3명이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기숙사 침대에 짐을 정리하던 소년은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방에 수학 문제집과 영어 문제집 한권만 챙기고, 정작 중요한 필통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그거 사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소년은 당시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매우 소녀적인 감성을 가진 필기구 덕후였답니다. 특색 없는 모나미 볼펜을 매우 싫어하여, 바른손 팬시 같은 곳에서만 필기구를 사왔던 낭만적인 소년이었죠. 그래서 평소에 애용해 왔던 필기구들 없이 본고사 시험을 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숨을 쉰 소년은,


뭐, 어쩔 수 있나?
그냥 필기구를 다시 사야겠네.


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네, 소년의 멘탈은 초합금 Z 처럼 단단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학교 내에도 학용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지만, 학교에 처음 왔던 소년은 자신이 제기동역에서 학교까지 걸어올 때 보았던 아주 작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를 나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음, 아닌가? 기억이 혼란스럽긴 하네요.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곳까지 걸어가는데 편도 15분 정도 걸린 소년은,


샤프, 지우개, 샤프심, 작은 자


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문방구를 나오려고 보니, 그 날이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가 발행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두 잡지는 당시 유명했던 슬램덩크와 드래곤볼이 연재되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꼭 챙겨보았던 터라, 소년은 그 만화잡지도 두권 구입했답니다.


폭설을 뚫고 소년은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던 중, 학교 앞 4거리에서 한 겨울의 붕어빵 장수를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여름에는 팥빙수
겨울에는 붕어빵


이란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붕어빵 장수를 그냥 지나치지 못 했답니다. 결국 붕어빵을 한봉지 가득 챙겨온 소년은 기숙사 방에 돌아와 침대에 엎드려, 문제집은 챙겨온 주제에 공부는 안 하고, 붕어빵을 먹으며 만화잡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이런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리는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인연이지만 같은 방을 사용했던 2명의 친구들에게 붕어빵과 만화잡지를 권했습니다만, 그 친구들은 이뭐병, 이라는 느낌으로 소년을 쳐다봤던 것 같네요, 흠흠. 결국 한명은 그 유혹을 견디지 못 하고 같이 만화책을 봤습니다만...


어쨌든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 7시, 소년은 시험 전에는 긴장을 푸는 것이 제일이라고 믿으며, 바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소년은 눕자마자 잠이 들어서 다음 날 오전 7시에 기상을 했습니다. 좋은 취침이었죠. 그리고 아침을 먹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던 중, 그 운명적인 방송을 들었습니다.


본고사 시험은 검정색과 파랑색 볼펜만 사용가능합니다.


...

...

...


헉! 그제서야 소년은 어제 문방구에서 샤프와 샤프심만 샀지, 볼펜은 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문방구에 갈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친구들에게 볼펜을 구걸하러 다닐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볼펜을 갖고 있지 않았답니다. 한참을 구걸하러 다녔던 소년은 같은 고등학교 동기친구가,


이거라도 쓸래?


라며, 건네준 파란색 모나미 볼펜을 보고, 좌절과 감사를 동시에 느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년이 당시 가장 극혐했던 필기구가 바로 모나미 볼펜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것도 파란색이라니!!


하지만 현실은 소년에게 너무나 잔혹했습니다.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고, 파란색 모나미 볼펜을 소중히 들고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소년의 멘탈은,


에휴, 내 팔자야.


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소년의 멘탈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강의실은 소년의 대학생활에 전공수업 때 종종 사용했던 강의실이라는 것은 뭐 나중에 알게 된 일이고, 어쨌든 소년이 그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앞에서 검은 색 모나미 볼펜을 쌓아두고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죠.


하아, 내 팔자야.


대체 그 고생은 뭘 위했던 것이었던지...


하지만, 멘탈갑이었던 소년에게 진정한 위기는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수학 사색_0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