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는 원래 조용하다.

푸치니의 Crisantemi

by 열정부메랑

Crisantemi는 이탈리아어로 국화들이라는 뜻이다.

단수는 crisantemo, 복수는 crisantemi.

말뜻만 놓고 보면 참 단정하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음악과 만나면, 의미는 조금 깊어진다.


이탈리아에서 국화는 축하의 꽃이 아니다.

흰 국화는 장례식과 묘지, 위령의 날에 놓인다.

말 대신 놓는 꽃,

소리 대신 남기는 마음.

그래서 crisantemi라는 단어에는 자연스럽게 침묵이 따라온다.


이 곡은 자코모 푸치니의 현악곡 〈Crisantemi〉다.

푸치니가 가까운 이를 잃고, 그 죽음을 위해 쓴 추모의 음악이다.

현악기만으로 구성된 이 곡은

울부짖지도,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낮은 호흡으로 머문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신 슬픔의 밀도가 낮아진다.

말은 줄고, 생각은 정리된다.

국화처럼 소리 없이 놓인다.

그래서 이 음악은 위로를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곁에 앉아 있을 뿐이다.


Crisantemi는 꽃의 이름이 아니라 태도의 이름이다.

크게 말하지 않고, 오래 남는 태도.

푸치니의 이 음악이 조용히 아픈 이유는

그 태도를 끝까지 지키기 때문이다.


사실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곡이다.

나는 조용하지도 않고,

감정을 절제하며 표현하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곡을 좋아하게 된 건

이것저것 클래식을 듣다

알고리즘이 슬쩍 건네준 덕분이다.


국화는 나에게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꽃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

남편은 늘 말했다.

“당신은 가을 국화야. 곧 만개할 거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창피했고,

아직 피지 않은 꽃이라는 말이

왠지 조급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말들이 마음 어딘가에 쌓여 있었다.

조용히,

국화처럼.


작년에 나는 책 한 권을 완성했다.

아직 출판사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꽃은 피는 순서가 있으니까.


자존감이 낮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이 곡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가을 국화다.

소란스럽지 않아도,

때가 오면 충분히 아름답다.


https://youtu.be/N2TIFSvYFjs?si=r-K07xeX4Zy80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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