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을 먹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현실적 상황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다. 과도한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는 세상은 객관적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이 살고 있는 주관적인 세상이 그들의 생각과 마음으로 불안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과 행동 아래에는 이 모든 것의 출발인 생각이 있다. 감정 밑에 숨겨진 생각을 바꿀 때 비로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정정엽 -
처방받은 약은 나와 잘 맞았다. (의사 선생님이 내가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 적은 용량을 써도 약효가 잘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예민한 게 반드시 나쁜 건 아니었다.)
약물치료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감정의 폭이 작아졌다는 것이다. 기분이 제일 안 좋을 때를 -10, 보통을 0, 기분이 제일 좋을 때를 +10으로 표현했을 때 하루 동안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같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10까지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동시에 같은 상황에서 긍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10까지 올라가지 않고 +6 정도에 머무르게 되었다. 양 극단에 있던 감정의 꼭지들이 제거되고 0에 가깝게 수렴하는 형태로 변해갔다. 우울한 감정도 줄어들고, 뭔가 막 하고 싶은 강렬한 열정(예를 들어 지속적인 나의 취미 찾기 여정)도 사그라져 한동안은 글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의 양극단이 제거된 일상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특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흐름이 느려져 결과적으로 화를 덜 내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나는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다, 나의 의식의 흐름을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먹는데도 살이 안 찌는 데는 이유가 있어."라며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오감 중 가장 예민한 부분이 후각이다. 냄새나는 것을 극혐 한다.(고등학교 때 교실 뒤쪽에서 어떤 아이가 새우깡을 몰래 먹고 있었는데, 교실 앞문을 열자마자 그 새우깡 냄새를 맡고 오로지 코로만 새우깡을 먹던 아이를 찾아낸 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빨래에서 꿉꿉한 쉰내가 나는 것을 진저리 치게 싫어한다. 그래서 세탁기에서 빨래가 완료되면 바로 건조기에 넣어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을 차단한다.
하루는 세탁기에 빨래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애들을 재우러 방에 들어가면서 거실에 있는 신랑에게 빨래 완료 시 즉시 꺼내 건조기에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들 둘을 재우다 보면 언제나 내가 먼저 잠들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시나 해서 열어본 세탁기 안에 쭈글쭈글 뭉쳐진 빨래가 까꿍 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알리는 불쾌한 냄새가 올라오고 순간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예전 같으면 그 냄새나는 빨래를 다시 했지만 옷에서 다시 꿉꿉한 냄새가 나는 장면, 세탁기 안에도 축축한 빨래를 12시간 이상 방치했기에 세균 증식으로 세탁조 청소도 해야 하는 장면, 세탁조 청소를 했어도 여전히 냄새가 나서 환기를 시키는 장면 등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파바박! 동시에 떠오르면서 분노 수치가 100점 만점에 90점을 찍었을 것이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서는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멍해지고), 악취로 부터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의 크기가 줄어들고(무뎌지고), 화를 쏟아내는 말이 적어지며(느려지며) 결과적으로 화를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로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동시에 약이 인지개선 기능이 있어서 인지, 그 결과로 예민한 것이 줄어들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나도 금방 가라앉았다. "지금 이렇게 화를 내서 뭐가 크게 달라지나?" 하는 자문자답을 하며 쓸데없는 생각은 줄이고 행동으로 바로 옮겼기 때문이다.
약물치료를 하며 제일 많이 들었던 생각은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느끼며 사는구나'였다.
감정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아닌, 잔잔한 호수 같은 삶.
약을 통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경험들이 쌓여서 몸에 축적이 되면,
약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도 좀 더 편안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오늘도 약을 먹으며, 조금은 힘을 뺀(때로는 다소 멍한)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