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치료를 시작하다
감정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과장하여 해석하지 말자.
속상하거나 불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게 내 삶의 전체인 것처럼 크게 받아들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감정은 마음의 상태일 뿐 실제 현실(actual reality)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박진영 -
비약물치료 15회기가 끝났다. 우울의 정도를 1~10으로 표현했을 때 어떤지 중간중간 나의 의견을 묻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여러 문항을 통해 15회 치료 후 나의 상태를 진단했다.
주관적인 우울의 정도는 낮아졌지만 실제 항목별로 자세히 보았을 때 현저하게 좋아졌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추가적으로 비약물치료를 계속하겠냐고 물으셨다.
비용이 1회에 30분당 5만 원으로 15회 치료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일정하게 주 3회 이상 규칙적으로 내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점심시간밖에는 대안이 없어서, 점심을 거르거나 대충 먹고 바쁘게 시간에 쫓겨가며 치료를 받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이 당시에는 회사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솔직하게 얘기도 못한 상황이라 어디가 아파서 매일 병원에 가냐는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고 가곤 했었다.)
약물치료 효능에 대한 불신,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더해져서 약물치료는 안 받겠다고 했지만, 이제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정신과 약도 30년전 외할아버지께서 복용하셨을때와 달리 '세련되어'졌다며 의사선생님은 나를 안심시켰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위장장애 등)에 필요한 다른 약들을 항우울제와 함께 처방해주셨다.
처음에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저녁에 먹고 나면 많이 어지럽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구토감이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말씀드리니, 위장약과 어지럼증을 완화시켜줄 혈액순환제를 같이 처방해주셨다. 약을 먹고 어지러운 증상은 자기 전에 바로 먹고 잠드니 좀 덜했고, 아침에 구토감 등은 시간이 지나니 점차 좋아졌다.
약의 용량은 소량으로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대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갔다. 짧게는 1주, 길면 4주에 한번 병원에 가서 상태가 어땠는지, 부작용 등은 없었는지 얘기하고 약을 타 왔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황들이 발생해서 잘 견디지 못한 경험을 말씀드리면 의사 선생님께서는 약의 용량을 늘려주셨다. 약의 용량이 늘어나면 확실히 더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지만, 동시에 버퍼링에 걸린 듯 멍할 때가 자주 있었다.
약을 복용하고 생긴 또 하나의 걱정은 그럼 언제 끊어야 하나, 이대로 계속 먹으면 중독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이번엔 "제가 약을 계속 먹어야 할까요?"란 질문을 계속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약의 분이 몸에서 다 빠져나와 중독되진 않습니다.
약의 용량이 적어서 바로 중단할 수도 있지만, 6개월 이상 먹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약을 끊었을 때 치료 이전의 상황으로 똑같이 돌아간다면 애매하겠죠?
다시 약물치료를 하게 된다면 용량을 더 늘리는 셈이 되기도 하고요.
꾸준히 치료하길 권해드립니다.
부작용 때문에 그러신다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약도 함께 처방해드리죠."
결론적으로, 비약물치료(경두개 자기 자극술, TMS)가 나에게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계속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아니다"이다. 부작용도 전혀 없고, 나의 생각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치료였다. 그래서 나의 현실에 맞는 약물치료를 계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