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상처를 남긴 불행한 사건과 기억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삶에 반복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나에게 있을 수 있다. 외부의 대상에게, 내게 상처를 주고 비난하는 역할을, 놀랍게도 나 자신이 허용하고 부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 마음은 그저 마음에 머물러있지 않고 세상을 '그런모양'으로 변형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숨겨진 마음이 있다'中, 장정은 저-
그저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상담실을 찾았다는 나에게, 상담 선생님은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내 감정을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주변 사람들과 상처 받지 않으며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나에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 진짜 내 감정이고, 내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방을 너무 의식해서인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너무 신경을 쓴다. 말하지 않음을 택하거나 쌓아뒀다가 한 번에 폭발한다.
회사라는 집단에서는 특히 더 조심스럽다. 상사와 부하라는 수직관계, 직장동료라는 수평관계가 공존하며, 남녀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하는 곳. 회사에서 어디까지 내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나의 의견을 개진해도 좋을지 그 선이 어려웠다.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사안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혹여나 너무 개인적이라고 생각할까 봐),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듣기 좋은 아부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을까 봐)조차 고민스러웠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가까운 사이인 신랑과는 그런 일이 더 자주 반복된다. 상담 선생님이 신랑과 내가 주고받은 카톡 내용을 보시더니 한마디 하신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네요. 두 분 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본인의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답답하겠어요, 두 분 다."
"그런가요?"
"날카롭게 느껴져요."
"그렇죠? 신랑이 좀 표현하는 게 강하긴 해요."
"아니요, 00님의 말이요. 남편분도 그렇지만, 00님의 평소 말투와는 다른 것 같네요. 화가 가득 느껴져요."
나만 참고 있기에 답답하며 애써 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도 똑같이 그럴 수 있겠다는 선생님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게다가 나는 생각이 많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그 생각이 휘몰아칠 때 그 흐름을 따라가면 한도 끝도 없다. 그게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하기가 더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그럴 땐, 의식적으로 멈춰보려 해 보죠.
그 생각을 계속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겁니다.
다만 그게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팁을 하나 드릴게요.
현실에 발을 디뎌보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앉아있다면, 의자에 닿아있는 엉덩이, 등은 어떤 감각인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느껴봅니다.
그렇게 생각의 흐름을 끊고, 지금 여기에 머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생각의 마침표를 찍는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연습을 했다. 걸을 때는 발이 지면에 닿을 때, 떨어질 때의 감각을 느껴보려 했다. 사무실에서 좋아하는 꽃화분을 두고, 그 꽃잎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단순히 노란색이라 생각했던 꽃도 가까이서 보면 반짝거리는 펄을 품은 부분도 있고, 쨍한 샛노랑도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을 했다.
거기에 하나 더, 나의 한계를 설정하기로 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기준점을 정해보았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정립은 힘들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그럴 여력이 없어요. 지쳤나 봐요."
"음... 글쎄요. 00 씨는 이미 많은 것들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글을 쓸 때의 모습은 힘이 없지 않아요. 오히려 힘이 넘치죠. 유독 어느 한 부분에만 힘이 없다고 느끼는 건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혹시, 관계를 들여다보고 재정립하는 걸 피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다시 한번 쿵, 하고 머리가 울린다. 어쩌면 나 자신도 속여가며 아예 보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어요. 찌르면 피가 나는 것은 당연해요.
상처 안 받는 방법을 찾는 건,
피가 나는 것을 막으려고 내 살갗을 두껍게 만드려고 하는 것과 같아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번 더 쿵.
마음의 갑옷을 입으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진실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 상담을 계속 진행했지만, 이후에는 어느새 상담실에서조차 상담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이야기만 기계적으로 하고 있었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마음의 갑옷을 상담실에서조차 다시 주섬주섬 입고 있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