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서부터 시작한다

의사선생님이 진료볼 때 컴퓨터로 작성하는 내용이 궁금하다면 : 의무기록

by 나다움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러므로 문제를 바라보는 내 사고방식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우울증이 내 사고방식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우울증이 나의 문제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 왜 그는 더 우울한 걸까? / 조너스 A. 호위츠(심리학자, 임상심리치료사), 이수경 옮김)-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식물 킬러이지만,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식물 수집가이다. 처음엔 다 같은 식물인 줄 알았는데 집에 들여와 비로소 그 이름을 알고, 이름을 통해 검색한 식물의 적합한 생육환경, 물 주는 주기 등 지식을 확보한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 식물에 대해 많이 알수록 식물 사망비율은 현저히 감소한다.


그렇지만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 식물 생육을 글로 배웠다고 모두 다 우리 집에서 생존하진 못한다. 하나둘 죽어나가는 살벌한 과정을 거쳐야만, 선인장도 말려 죽어 나가는 우리 집에서 살아남는 개체들이 추려진다. 죽어가는 식물들의 숭고한 죽음(?) 덕분에 알아낸 고귀한 진실들이 있다. 우리 집 베란다 중 한여름에 식물을 태울 수는 지점이 있다는 것, 특정 화분은 모양만 이쁘고 물 빠짐은 안돼서 심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 추운 겨울밤 창문 열고 식물에게 물을 주면 그 다음 날 동사한 식물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을 경험으로 알아냈다.(나를 스쳐 지나가서 제수명을 다 하지 못한 식물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사과를 드립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힘들어서 병원에 갔으니까 당연히 그냥 우울증이려니 하고 다녔던 병원이었는데 어느 날 궁금해졌다, 정확히 내가 가진 병 이름이 뭘까, 이 병의 특징은 뭐지? 그럴 땐 간단하게 의사 선생님께 직접 물어봐도 되지만, 병명뿐만 아니라 정확히 이 병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의사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며 치료를 하시는지, 진료 볼 때마다 컴퓨터에 작성하시는 내용이 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의무기록"을 요청해 발급받아봤다.(참고로 '의무기록'은 본인이 요청하면 발급이 가능하고, 본인 동의 없이는 공개 불가의 자료이며, 발급 시에는 소정의 비용이 발생한다.)


나의 자세한 진료기록을 보고 나서 장단점이 있었다. 객관적인 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점은 좋았지만, 어설프고 과한 정보는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이를테면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행보를 보일 때의 내 반응이었다.




나 : 선생님, 요새 제가 업무상 타인이 제출한 진료기록지를 봐야 해요. 그런데 저랑 같은 병을 앓고 계시는 분을 봤어요. 그런데 그분은 1년째 회사를 못 나오시고 휴직 중 이시더라고요. 물론 개인의 감정, 경험 등이 다 다르긴 하지만, 제가 앓고 있는 병만으로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게 저에겐 좀 충격이었어요. 저를 반추하게 되었어요. 나는 개인의 취약성과 환경적 스트레스 중 어느 것이 내 병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졌어요.

의사 선생님 : 그럴 수 있죠. 그럴 때 한 가지 팁을 드리면, '개인적 취약성', '환경적 스트레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진 않아요. 물론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일시적으로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어요. 그럴 땐 현재 나에게 집중하는 거예요. 어쨌든 지금 난 내 역할을 해내고 있고,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말이죠. 그것을 돕기 위해 이렇게 진료도 보고, 약도 먹는 거라고요.


이름을 알고, 인터넷에 따른 생육환경을 맞춰줘도 나의 집에서 식물이 살아남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듯, 내가 나의 병명을 알았다고 해서 그 양상이 타인과 동일하진 않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식물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 무조건 식물은 햇빛을 좋아하는 줄 알고 반음지 식물을 양지바른 곳에 뒀다가 말라 죽이는 일은 최소한 막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일반화된 정보를 나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나를 알아가는 정보 중 하나로 생각하며 맹신하진 않기로 한다.


지난 진료기록들을 쭉 살펴보며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내가 그동안 꾸준히 병원을 다니고 치료를 받으려고 노력한 것만으로도, 이게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식물의 이름을 알고 정보를 알아도 내 집에서 키울 때는 또 다른 변수가 있듯이, 내 병명을 알고 의학지식이 쌓여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내 병이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에 맞물려 어떤 양상으로 변모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오늘 하루, 매 순간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