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욕먹을 거면 내가 편한 길을 택한다

갑작스러운 약 증량에 대하여

by 나다움

내 마음속에서 정해놓았던 기한인 3년이 흐르고 난 후에도 나는 첫 직장을 떠나지 못했다. 이직을 할 자신이 없었으면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 회사의 좋은 점들을 하나하나 꼽아보고 그곳에 남아 있는 편을 택했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불안정한 가능성보다는 불행 속에서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편을 선호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나 자신에게 그렇게 설득할 때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고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다이어트에 문외한(?)인 내가 친구에게 "치팅데이"이란 말을 들었을 때 치킨을 떠올렸다.(치팅을 치킨으로 생각하는 나란 여자... 생각보다 먹을 것을 좋아합니다. 하하하) 나중에 그 뜻(다이어트를 하며 식단관리를 하다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날)을 알고 나서, 이게 뭐지? 이러면 오히려 다이어트에 역효과 아닌가, 서서히 음식을 줄여가다가 하루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다니, 이러면 이제까지 노력이 다 헛수고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실전 다이어터들의 애환(?)을 들어보니, 식단 조절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고 음식의 강렬한 유혹을 매번 뿌리치는 게 한계가 있으니 오히려 이런 치팅데이가 있음으로써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한다.

나에게도 "마음의 치팅데이"가 찾아왔다. 그동안 잘 조절해오던 마음이 급작스러운 태풍급 습격(?)으로, 억눌렀던 식욕이 폭발하듯 절제되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한번 터진 식욕이 잘 억제가 안되듯, 나 역시 봇물 터지듯 쏟아진 내 감정을 주어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름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약을 줄여가고 있던 터라 2달에 한 번씩 가던 병원이었는데 급하게 진료를 예약했다.





나 : 선생님, 타인이 제가 가진 병으로 인해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비난을 해요. 실제로 객관적으로 보셨을 때, 저의 병이 타인에게 악영향을 주나요? 제 상태가 정말 그런 거라면 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의사 선생님 : 그분이 어떤 기질과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기에 제가 직접적인 답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엄마 역할이든, 직장인으로서 역할이든 약물을 써서 이 상황을 견뎌보겠다고 치료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이상 더 어떻게 노력을 하라는 말이냐 하고 항변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고 싶어서 가겠어요. 그것을 약하다고 비난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악영향을 준다는 판단 자체는 굉장히 미숙한 판단이죠. 병이 들어서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병이 들어서 손해를 보고 사는 거죠. 엄마 역할을 10을 하고 싶은데 에너지가 없어서 5만 하고 산다, 이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느낌인데 그런 상황에서 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서로 비난만 하는 상황일 텐데요.

어차피 약을 먹는다고 비난을 받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약을 늘려서 00님이 좀 더 편안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배짱 있게 할 것은 하세요. 거기에 휘둘려서 나의 역할을 못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 그때는 00님이 약한 거니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약의 용량을 늘려도 성인이 원래 일반적으로 먹어야 하는 양에 비해서 작습니다. 안 먹을 거면 몰라도, 약의 도움을 10을 받을 수 있는데 왜 3으로 만족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약을 좀 더 증량해볼까요?


그렇게 복용 양을 평균 성인용량으로 증량하였고, 또 한동안 그 용량을 유지 중이다. 서서히 줄여가고, 종국에는 끊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상황이 버거울 때는 약의 도움으로 나의 역할을 다시 이어나가려 한다. 그것은 약한 것이 아니라, 배짱 있게 내 역할을 해나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되뇌면서 말이다.

한 번은 기존 대비 증량(여전히 성인용량에는 못 미치지만, 나는 약발도 잘 받는 편(?)이라서 소량만 쓰고 있었다)으로 인해 너무 나른하고 노곤하고 힘이 풀리는 기운이 느껴져서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과 상의 끝에 용량을 줄이고 다시 괜찮아졌다. 이번에는 그때와 같은 용량까지 늘렸지만, 오히려 더 적합한 듯하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나의 상황과 몸상태에 맞춰서 의사 선생님과 진료 후 약을 조절해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약을 먹지 않겠지만, 그리고 그게 내가 바라는 바지만, 현실에서 내가 너무 힘들고 견디기 힘든데 그것을 아무 도움 없이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며 나를 더 닦달하지는 않으려 한다. 어쩌면 약을 먹는 것 자체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연습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조금 더 대담하게, 타인의 거친 말들은 툭툭 털어내며, 내 안에 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 할 일을 해나간다. 그렇게 마음의 치팅데이가 지나가고, 다시 차분히 마음관리를 해본다.


*혹시라도 이 글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 첨언을 하자면, 약 복용 여부 및 용량 조절은 철저하게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약 복용에 대한 저의 입장(약은 가능하면 적게 쓰고 싶고, 사정상 올해까지만 이 병원을 다닐 수 있기에 점점 용량을 줄여서 약 중단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최대한 존중해주시되, 의사인 전문가 입장에서 약에 대한 객관적 정보 등을 주시며 약 복용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약을 늘리는 것, 줄이는 것, 혹은 중단하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은 채, 그저 내 역할을 다하며 삶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마음관리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