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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Feb 11. 2023

밸런타인데이라 쓰고, 또 하나의 숙제라 읽는다

나의 마음관리 루틴. 피할 수 없으면 대충 해, 즐기긴 뭘 즐겨.

  발렌데이는 나에게 그냥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한국에선 밸런타인데이가 '한참 달달하고 알콩달콩한 사람들'이란 소수 집단에게 필요한 날처럼 보였기에,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했다.(참고로 나는 우리 집에 사는 어머님 아들과는 한참 지나버린 시큼털털한 사이다. 하하하)  그런데 미국에 와서 내가 밸런타인데이를 챙기고 있을 줄이야.

  속 사정은 이러하다. 매일 가는 마트에 밸런타인데이 관련 상품이 등장할 때부터 슬슬 불안하기 시작했는데, 아들 학교선생님이 덜컥 메일을 보내주셨다. 밸런타인데이 준비를 위해 반 아이들 28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첨부파일을 보내준다는 이해할 수 없는 메일이었다. (영어로 쓰여있기에 한눈에 안 들어온 것도 있지만,) 다시 읽어도 이해가 안 갔던 지점은 밸런타인데이가 특정한 개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달달한 날이 아니라 반 아이들 전체가 함께하는 일상적인 행사라는 것이었다.

 

[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아들 담임선생님의 메일. 다시 봐도 귀찮다. 하하하]


   밸런타인데이 한 달 전에 받은 메일이라 다이어트 계획처럼 '오늘 말고 내일 해야지'로 미루다가, 밸런타인데이를 한주 앞두고 급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할까 생각도 했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다 챙긴다는 엄마들의 여론을 듣고 잘 모를 땐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게  편한 습관이 발동했다.)

   밸런타인데이니까, 당연히 초콜릿을 사서 보내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또 그게 아니었다.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진 않았지만, 미국에는 알레르기 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사탕, 초콜릿 등)은 밸런타인 선물로 가져오지 말라고 아예 공지사항을 주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한 번 시름이 깊어졌다. 그럼 도대체 뭘 사란 말인가.

   또 한 번 집단지성의 힘이 모여있는 맘카페('미국 버지니아 맘 카페'는 사랑입니다. 하하하)란 정보의 바다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아마존에 "valentines day school gifts  for kids"로 검색하면 개당 $1 정도 하는 선물들을 한 번에 살 수 있다고 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상품후기 많은 무난한 학용품(지우개, 연필, 자 등으로 구성)으로 골랐다. 며칠 후 도착했는데, 개별포장되어 있는 게 배송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구입자가 하나하나 묶음으로 온 학용품들을 손수 다시 포해야하느 수고로움이 가미된 택배였다.(어쩐지 싸더라... 내 노동력을 넣어야 비로소 완성품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개별 포장이라는 가내수공업의 과정과 아직 알파벳 "b"와 "d"를 헷갈리는 아들이 반 친구들 이름을 카드에 쓰는 것을 하나하나씩 검수하는 단계를 끝으로 밸런타인데이 준비를 마쳤다. 하루 반나절은 꼬박 걸렸다.

  밸런타인데이 준비를 끝내서 홀가분한 나와 달리, (날 닮아서 ) 걱정부자인 첫째 아들은, 아직 한 달밖에 안돼서 27명의 친구들 이름과 얼굴이 매칭이 잘 안 되는데 어떻게 나눠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나머지는 아들에게 맡기고 어쨌든 (내 아들의) 밸런타인데이 준비는 이렇게 끝이 났다.(아들아, 내년엔 네가 직접 하면 안 되겠니? 하하하)

[아마존이 보내준 택배상자에서 모든 물건을 꺼낸 후  다시 재포장하고, 카드에 반 친구들 이름을 한명씩 쓰고, 포장해서 붙이면 끝. 온 가족이 첫째의 발렌타인데이를 준비에 동참]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귀찮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내가 몰라서 예상하지 못했던 이벤트들까지 추가되어 요즘 엄마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누군가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하는 것 자체가 싫어서 겨우 하는 일을 신나게 즐기려면 나의 노오력을 너무 많이 갈아 넣어야 하는 일이 돼버린다. 내가 하기 싫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인데 뭘 또 그렇게 까지. 내 의지와 체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귀찮으며, 나에게 직접적으로 뭔가 드라마틱한 반전매력이 있지 않은 일(지금처럼 아들 밸런타인데이 선물 준비하기)은 대충 하기로 했다. 일일이 손수 다 만들지 않고, 아마존에서 반 완성품을 사서 포장만 한다던지 등 적당히 구색만 맞춘 것이다.

   사실 난 회사생활 1년 차 밸런타인데이 때 같은 과 사람들 전원에게 쿠키를 직접 만들어 포장하고, 한 명 한 명 에게 문구도 달리하는 손편지까지 써서 돌렸던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때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그 일을 즐기기까지 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잃은 것도 있다.(얻은 것은 회사에서 더 많은 일, 잃은 것은 내 건강이다. 하하하.) 그래서 이제는 함부로 무언가를 즐기지 않고, 내가 즐기고 싶은 일은 신중하게 고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꼭 해야 하는 일은 영혼을 내려놓고 대충 한다, 내 에너지를 아끼면서.

   

  오랜만에 챙겨보는 밸런타인데이, 사뭇 느낌은 다르며 설렘보다는 귀찮음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래도 마트에 알록달록 알콩달콩한 디스플레이를 보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그러면 또 뭔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내 안의 자동화된 성실함이 나를 깨우려 한다.(요새 자꾸 베이킹을 해볼까 고민 중이다, 진짜 고민만 2달째이다. 하하하) 하지만 '나의 이 피할 수 없는 성실함'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에만 써보려 한다. 잘 들여다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주입한 소망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요새 신랑이 자꾸 "취미로 베이킹해 보면 어때? 애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란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이래서 세뇌가 무섭다. 훠이훠이.) 진짜로 내 마음속에서 원해서 하고 싶은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한 후 내가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일'에만 나의 시간과 노력을 선택적으로 투자하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강제로 부여된 나의 의무를 적당히 넘겨본다.


  

덧. 피할 수 없으면 대충 해야 한다. 즐길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신났겠지. 어설픈 합리화 대신 어물쩍 지나가도록 대충 해본다.(참고로 신랑에게 한마디. 신랑에게 주는 밸런타인데이 선물은 피할 수 있는 거라서 아예 패스했어.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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