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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1. 2023

그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불편하지 않다 말한다, 왜?

모든 말은 직설적으로 짧고 간단하게 : 직언가

  미국에 살면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 후 돌아서는 길에는 아쉬움이 잔뜩 남는다. '아, 이 얘기 아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후속조치로 내 영어실력을 더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비슷한(때로는 나보다 더 얄팍한) 영어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한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 영어로 다 할 수 있어. 난 지금 내 영어실력에 만족해.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하려고 했지만, 실상을 들여보니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얼마 전 둘째 아들이 스쿨버스에 내리면서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같은 반 친구가 우리 아이를 을 때렸는데 이번이 벌써 3번째였다. 이미 학교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분리조치를 취했고 한동안 괜찮아서 해결된 문제로 생각했는데 또다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이 엄마에게 직접 이 사실을 알리고 주의를 부탁해야겠다고 맘먹었다.  

  난 MBTI가 INFJ로 남에게 불편할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혼자 일어날 수 있는 대화를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다 생각해 본 후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면서 내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 하기 때문이다. (종종 대화하기 전부터 이미 지쳐 피곤하다.) 게다가 내 아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드는 수많은 생각을 정제하고 다듬어서 명료하면서도 공손하게  정리하는 것도 한참 걸리는데, 다시 이 말을 부드럽게 영어로 옮기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혼자 대본을 써보고, 챗 GPT를 돌려서 문법적 오류를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외우고 있을 때였다.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남편이 해당 아이의 엄마와 몇 마디 하고 오더니 해결됐다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내가 당황하며 뭐라고 했냐고 물으니,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자, 애들 얘기다, 니 아들이 내 아들을 세 번이나 때렸다"라고 말했단다. 그 아이 엄마가 미안하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주의 주겠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피해자고, 틀린 말도 없었지만 난 잠시 얼어붙었다. 실제로 그 엄마가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저항하는 아이를 겨우 준비시켜서 스쿨버스를 태우러 가는 길에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린 비보를 갑자기 듣고, 대리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싶어서 내가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그 집 아이가 위로 10살 이상 차이나는 형만 둘이라서 표현이 다소 거친 편이라는 사실을 그 엄마와 이전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고, 실제로 내 아이와 스쿨버스에 내려서는 웃으며 장난치며 논 것을 알기에 혹시나 싶어서 내가 준비한 말을 덧붙였다. "저희 아이랑 잘 놀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 같은데, 그 방식이 내 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그리고 바로 화제를 돌려서 어제 아이들 필드트립에 따라갔었는데 댁의 아드님이 잘하고 있더라, 사진을 찍었는데 보내주겠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연락처도 교환했다.

   내 아들이 친구와의 갈등으로 울었던 게 아직도 속상하기에 에둘러서 항의 표현을 했지만, 그 엄마도 나와 같이 이제 학교를 처음 가는 아들을 둔 학부모의 입장으로 아이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계속 가르치고 다듬어가는 지난하고도 인내력을 요하는 작업 중인 게 먼저 공감이 되었다. 만일 그 아이 부모가 우리 애는 그런 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면 더 강하게 나가는 버전도 준비해 놨으나, 너무 미안해하며 한껏 쳐진 그 엄마의 어깨에서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학교라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아들을 둔 엄마란 공감대를 바탕으로 서로를 토닥이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사안에 매우 복잡 다난한 감정들과 절차들을 생각하고 대응하고, 이제는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까지 추가되어 과부하가 걸리는 나와는 달리, 남편의 대응은 언제나 매우 간단하고 쉽다. 문제해결형에 특화된 데다가 모르는 사람과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는 친화력에, 다른 사람의 감정 배려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임기응변이 강한 남편이다. 따라서 애초에 한국말로도 하고 싶은 말이 간단명료하며 직설적인 게 몸에 배어있기에, 짧은 간단한 영어으로도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나는 모국어로도 수만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줄여서 겨우 입 밖으로 나오는데, 영어로 말하려니 그 장황한 말을 미천한 영어실력에 맞춰 다시 줄이고 다듬는게 참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한마디로 이럴 땐 남편이 부럽다.

직선으로 쭉 뻗은 슬라이드처럼, 남편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곧장  와닿는다.

  뭐든 항상 좋고, 항상 나쁜 것은 없다. 집안에서 나에게 활동시 우리 집 직언가는 '귀에서 고름이 나와서 아파'라고 하면, 곧바로 '여행자 보험되니 이비인후과를 가봐라'라고 말하고, '우리 아들이 다음 주에 00발표한대'라고 하면 '그거 내가 알아야 하는 사항이야?'라는 확인형 질문이 돌아오고, 내가 장황하게 주절주절 떠들어대면 남편은 두 마디로, '그러니까 00이라는 거지, 내가 상관할건 아니네' 라며 모든 상황에 AI 같은 정제된 유사정답을 제시하며 매사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춘다. 때로는  나 같은 극단적 감정형(F)의 마음에 스크레치를 내며 나 같은 이에게는 '수요 없는 조언가'로서 환영받지 못하지만, 많은 곳에서 '문제해결형 직언가'로 오늘도 열심히 활동 중인 남편을 멀리서 응원한다. (가까이 말고, 멀리서. 그리고 나한테는 활동 자제를 권고하는 바이다. 하하하)



덧.

남편의 직언가로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한 번은 아들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회의 시 건의사항을 말하라고 했는데, 원장선생님께 단순한 행사에 각 반의 선생님들을 늦게까지 동원하는 것은 지양해 달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반 선생님인 다수는 좋아했고, 원장선생님 한명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고. 이렇듯 가끔은 '수요 있는 조언가'이기도 한 것 같다. (거듭 강조하지만, 주로 나 말고 남에게만 활동해 줘.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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