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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Sep 20. 2023

아무 말 없이 뒤에 서있기만 해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져

함께하면 교환, 환불, 항의에 유리합니다 : 카리스마 해결사

  우리 엄마가 사윗감으로 잘 얻었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는데, 결혼식장 예약하러 갔을 때 일이다. 다가오는 일정 속에 여전히 많이 남은 선택지 앞에서 난 점점 웬만한 건 묻어두고 오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결혼식 당일 혼주의 머리는 어떻게 할 건지부터 시작해서 메이크업 추가 시 비용 등 장황한 설명이란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선택의 미로에 갇혔다. 그리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묻는 이의 말에 웃으면서 네, 네 만 하고 있었다.

  그 시각 남편은 결혼식 진행사항과 관련해서 폭죽 등 추가결제사항에 대해서 눈만 웃은 채 단호한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단칼에 거절한 후 나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정확히 말하면 결혼식 자체를 애써 내 기억에서 지운 듯하다. 하하하), 결혼식장 관계자가 선택사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소 강압적으로 이건 해야 한다는 투로 말했고, 엄마와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대충 넘어가며 씁쓸한 웃음만 서로 주고받을 때였다. 남편은 그 상황을 지켜보더니, 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차가운 논리로 거침없이 대화하는데 흡사 100분 토론의 손석희 아나운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생각은 안 나지만, 그날의 대화를 대충 복기하면 다음과 같다.

"잠시만요, 대표님.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0000이고, ****해야 하는 거란 말씀이신 거죠? 그런데 그건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분으로 보이는데 맞나요? 그렇다면 저희는 ****는 안 하고 기본만 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감사드리고, 저희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편은 대부분 상황에도 잔잔한 호수같은 말투를 유지한다(나랑 대화할때 빼고. 하하하)

  나랑 엄마는 둘 다 생긴 것부터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태어나서 한 번도 저체중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목소리도 작은 편으로 좋은 말로 인상이 좋고, 나쁜 말로 하면 딱 호구상이다. 게다가  MBTI에서 '직관형(N)'인 나는 무성한 생각의 숲이 자라는데 대략 3초, 그 수많은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기 위해서 3분 이상이 걸린다. 또한 MBTI '감정형(F)'으로 타인과 감정교류가 매우 중요한데, 특히 타인의 의견과 반대인 상황의 경우에는, 그와 내가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를 예상하고 내 생각을 대략 종이에 적어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몇 번 입으로 중얼거린 후 비로소 상대방에게 음성으로 닿는다. (한마디로 남편입장에서 보면 고구마 100개 먹은 듯 답답하기 그지없다. 하하하)

  반면에 남편은 쌍꺼풀 없는 눈에 눈꼬리가 하늘을 향하고, 사람 많은 거리에서도 상반신이 잘 보이는 제법 큰 키에 약간 중저음의 목소리로 첫인사를 건네면 좋은 말로 하면 카리스마 있고, 나쁜 말로는 잘못 걸리면 좋을 게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게다가 남편은 나와 반대로 '감각형(S)'으로 매우 현실적이며, '사고형(T)'으로 수학공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논리적인 사고로 촌철살인을 날릴 때가 많다. 다소 매서운 외모와 날카로운 성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남편은 '해결사'로 활약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반대로 내 입장에서 저런 말을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다고? 를 자아내는 연구대상이다. 하하하)


서로를 자극하는 발작버튼을 가진 우리 둘은 대화를 하다보면 헐크로 쉽게 변한다. 하하하

  엄마는 내 결혼식을 준비하며 사위에게 해결사의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교통사고 처리과정에서 느꼈다. 직진하던 내 차량을 상대방 차량이 교차로에서 갑자기 돌진하여 충돌한 적이 있다. 당시 너무 당황하여 차에서도 못 내리고 있다가 뒤에 있던 택시기사님의 도움으로 사진을 찍고는 가까스로 차를 한쪽으로 옮겼다. 상대방은 50대 건장한 체력의 남자분이셨는데, 차에서 내리면서 나를 힐끗 보더니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아서 남편에게 걸었다.

  흔히들 MBTI 약식 검사 질문(?)으로 알고 있는, "나 교통사고 났어"라고 하자 남편은 T성향의 모범답안 "보험회사에 전화했어?"라고 첫 말문을 열었다. 당황한 나는 아직 안 했다고 하자, 남편은 날 선 목소리로 계속 물어댔다. 차는 얼마나 다친 건지,  어쩌다가 교통사고 났는지, 사진은 찍었는지 등을 상세히 취조(?)하고는 곧 오겠다고 하고 뚝 끊었다. 교통사고에 당황했지만, 남편의 질문폭탄은 황당했다.

  이어서 한 가지 더 놀라게 되는데, 바로 상대방 차주의 태도였다. 나랑은 보험회사 서로 부르자는 얘기만 하더니만, 본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남편이 매서운 눈길로 입만 웃으며 '이분 남편되는 사람입니다'라며 악수를 청하자 그분의 뻣뻣했던 허리관절이 곧바로 유연해지며 나에게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죄송합니다'라며 갑자기 로봇연기를 시연하셨다. 그제야 그분이 사람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시는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만만한 사람이었고 남편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뒤에 있기만 해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본값이 만만해 보이는 나는 남편과 함께하면 항의, 교환, 환불에 유리하다. 명백한 장점이며 또다시 발견한 남편의 쓸모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괜찮냐고 안 물어보고 보험회사 연락여부를 먼저 확인할 수 있는지  내 기준에서는 참으로 인간미 없고 섭섭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나중에 교통사고 처리과정에서 상대방과 통화를 자처하고, 보험회사 대응 등 많은 과정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며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를 보고 처음에 남편을 향한 감정의 앙금이 많이 사라졌다.

  더 시간이 지나서 MBTI에서 사고형(T)들은 대부분 위와 같은 반응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잠시 나를 반성했다.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연습을 심리상담선생님과 한참 했는데, 여전히 나는 내 기준대로만 타인을 판단하고 규정하였던 것에 대해서 말이다. 상대방과 나는 전혀 다른 개체이기 때문에, 궁금하거나 의문이 드는 사항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조언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한참이 지나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내 기준에서는 교통사고 났다고 하면 제일 먼저 '괜찮아?'라고 했을 텐데 왜 내가 괜찮은지 안 물어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 남편은 그 1+1이 2라는 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당연히 괜찮으니까 멀쩡히 전화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걸 뭘 물어봐. 교통사고 당했을 땐 보험회사에 먼저 전화해 다음부턴. 알았어?'라고 답한다. 그제야 나의 마음 밑바닥에 눌어붙은 감정의 찌꺼기마저 떨어져 나간다.(여전히 말투는 거슬리지만. 하하하)

  MBTI가 유행하고 나서 사람을 어떻게 16가지 유형 안에 넣느냐 등 비판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내 기준에서는 특히 이해가 안 가는 어머님 아들이 나와 다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눈에 보이는 지표가 되었다. 또 그럴 땐 자연스럽고 간단히 MBTI를 얘기하며 갈등상황마저 재밌는 밈처럼 '너 T야? '라고 속으로 되뇌며, 유머로 넘기는 여유도 생다. 그렇게 마음이 한 뼘 더 자라난 듯하다.

 


 덧. 남편을 닮아 첫째 아들 역시 '괜찮아?'란 말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님 아들은 양육대상이 아니기에 제처 두더라도, 아빠 닮아 사실위주의 객관적이고 문제해결적인 관점이 특별히 발달한 내 아들에게는 꾸준히 연습시킨다. 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앞에 '괜찮아?'만 살짝 쿠션처럼 넣어주면 한결 부드러워질 것 같다고.

 내 아들은 이미 체화되었고, 옆에서 어머님 아들은 자꾸 쳐다본다. 그래서 어머님 아들에게 조심스레 제안한다. 강요는 아닌데, 자꾸 쳐다보지 말고 같이 할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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