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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1. 2023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이반장

 재주가 넘치고 할 일은 많다 : 우리 집 관리인

  아파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관리사무소의 경비아저씨를 찾듯이,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생활밀착형 해결사인 우리 집 관리인, 남편을 찾는다. 남편은 말 그대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상되는 문제점까지 미리 파악하여 대처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우리 집 관리인이 되시겠다.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런 것이 있다. 마당에 벌집이 생겼다는 나의 호소에 벌 퇴치스프레이를 지참하고 하루 1시간씩 꾸준히 1:1 맞춤 퇴치(?) 한 결과, 1달 만에 땅벌이 벌집을 우리 집에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참고로, 나는 바퀴벌레를 포함해서 모든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고 다 때려잡을 수 있지만, 벌은 사진조차 잘 못 본다.) 덕분에 무사히 뒷마당에 나가고, 안심하고 창문을 열을 수 있었다.

  잠재적 문제점에 미리 대응하는 예시로는 다음과 같다. 남편은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 값싼 가격에 즐겨 먹었던 채소를 먹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직접 뒷마당에 고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종자를 심는 과정을 택한다. 미국에서 구하기 힘들고 단가가 비싼 채소가 무엇인지 마트를 돌며 시장조사를 한 다음, 엄격하게 고른 품종(상추, 깻잎, 청양고추 등)을 씨앗 또는 모종을 사서 기르기에 이른다. 한 번은 깻잎이 여린 새싹일 때 밤마다 달팽이들이 갉아먹는 것을 보고 극대노 하더니, 달팽이가 출몰하는 시간인 밤에 손전등을 들고 매일 1시간씩 달팽이 소탕작전에 임했던 전력도 있다.

  기본적으로 눈썰미가 뛰어나며 손재주가 좋다. 다소 내구성이 떨어지는 물건이 부서지거나 고장 나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때도 남편이 나타나서 수리한다. 직접 수리가 어려운 것은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미국에 와서 집에 있던 냉장고가 매우 낡아서 냉장 기능이 시원치 않았는데, 고장 난 것은 아니라서 애매하던 차였다. 남편은 집주인이 정원 나무를 정리하러 직접 오는 날에 나무 전지를 본인이 나서서 멋지게 하고, 집주인과 잘 얘기하여 우리 집에 낡은 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꾸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모든 일엔 명암이 있다.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며 우리 집 살림살이가 나아지는데 많은 일조를 하는 남편이기에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모든 일에는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우리 집은 남편의 다재다능함과 (나 빼고, 남 한정) 다정함이 결합하여  우리 집 관리인은 그 영역을 확장하여 우리 동네 관리인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이반장'으로 자체 업그레이드 하여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우리 동네 관리인님은 우리 집 세면대가 막힌 것도 뚫지만, 직장동료 욕실에 샤워기가 너무 높다는 민원에 부응하여 고치러 출장 가기도 한다. 차가 없는 이웃주민이 새벽에 우버를 타고 가는 게 무섭다는 이야기에 저녁형 인간이 6시에 기상하여 차로 30분 거리를 데려다주는 안전지킴이로 활동하신다. 물론 때때로 소정의 돈을 받거나 또는 현물(김, 참치, 드라이기 등)로 노동의 대가를 받아오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동네 관리인'으로서 역할 자체를 즐기는 가히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매우 선한 마음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그럼 이게 왜 단점이냐고 물으면, 여기서 예외가 있는데 내가 우리 집 관리인을 소환하면 짜증과 역정을 내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보지 않았지만, 단언컨대 남들을 도와줄 때는 한없이 천사 같지만 나는 남이 아니기에 다정함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남편 입장에서는 내가 자주 민원을 호소하기에 그럴 수도 있고, 또 남들처럼 현물이나 현금을 대가성으로 지급하지도 않고, 가끔 솔직한 피드백을 팩트위주로 전달하기에 달갑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뭐랄까, 나만 알던 가수가 성장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랄까. 우리 집 관리인으로 시작한 남편이 우리 동네 관리인으로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욕먹는 거 보단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저것까지는 안 해도 될 텐데 하며 혀를 끌끌 찰 때가 있다. 저 에너지를 아껴서 가장 가까운 불우이웃인 나에게 다정하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우리 동네 사람들까지 챙기느라 바빠서, 반대로 내가 우리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의 영역이 점점 커진다는 점도 안타깝다.  

우리집 관리사님은 진취적인 자세로 우리동네 슈퍼히어로(hero) 마냥 매우 분주하시다. 정체를 숨기는 슈퍼히어로들과 달리 칭찬과 인정을 좋아하는듯 보인다. 하하하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흔한 진리를 또 한 번 몸소 깨달으며, "나의 기대도 나의 몫이다"라는 명상의 한 구절을 또 떠올리면서, 너무 완벽한 잣대를 남편에게 들이댔던 것은 아닌가 나를 돌아본다. '잔재주가 없고 아무것도 못하며 남과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동분서주 활동하며 넘치는 것은 이웃과 나누고 또 반대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훈훈한 우리 동네 관리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는가, 하며 나도 모르게 높아진 기대를 다시 재조정하기에 이른다.


    여름에 식사 때마다 바로 따먹었던 상추가 이제 노쇠하여 더 이상 먹지 못하고, 깻잎은 이제 열매를 맺으며 당분간은 못 먹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봄부터 활발히 활동했던 농부님의 역할은 날이 추워질수록 휴식기가 다가오고 있고, 이는 우리 집 관리인의 역할이 하나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여유로워진 시간 속에서 나에게도 여유롭기를 잠시 바라본다.   

     

방울토마토인줄 알았고 받아온 토마토 씨앗, 잊고 있었는데 잘 키워낸 우리집 농부님, 미안해. 앞으로도 난 내 아들말고 다륻건 기를 생각이  없어.


덧.

  가족들을 위해서 건강한 식재료 공급을 해주는 농부님으로서 활동은 200% 지지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미안하다. 나와 아들 둘은 어디 축제현장 또는 행사장에 가서 씨앗이나 모종을 받고는 인증샷만 찍으면 끝인데, 우리 집 농부님은 그것을 다시 열매가 맺을 때까지 키우는 고생을 하고 있다.

  지난봄에 토마토 씨앗과 작은 화분을 주는 행사장에서 씨앗을 심고 나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리 집 농부님의 귀한 손길 덕분에 주먹만 한 토마토가 열려서 맛있게 먹었었다. 토마토는 미국에서 쉽게 살 수 있고 가격도 싼데, 지지대 만들고 귀중한 농작물(단가 비싼 깻잎, 상추 등)을 해친다며 투덜대지만, 끝까지 책임지고 식물을 가꾸는 츤데레 농부님이기도 하다.

  근데 한 가지 상기하면 좋을 게 있어. 농사일을 핑계로 자꾸 애들 봐야 할 시간에 뒷마당으로 홀연히 사라지는데, 내년엔 우리 아들 둘이란 귀한 자식을 잘 키우는 것에 집중하는  좋것 같아. (상추와 깻잎은 한국 돌아갈 때까지 참을 수 있는데, 자꾸 농사일에 집중하면 그건 못 참을 것 같아.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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