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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1. 2023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한다, 내 심장에 무해한 사람이.

결혼의 쓸모 :  '연애세포 파괴자'이자 '현실감각 상기자'와 사는 것

  어릴 적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파스텔빛 가정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착한 아내로 보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것이다. 육식동물이 채식을 동경하듯, 뭔가 내게 맞지 않는 것을 자꾸만 고집한 끝에 결국 얻은 것은 병약한 신체와 피폐한 정신이었다.

  나의 오랜 꿈, 현모양처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동화를 읽으며, 나도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온갖 역경과 시련을 겪고 인내로 버티면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될 줄 알았는데, '그 후로 오래오래 호구로 살았습니다'가 되어버렸다. 현실을 깨닫고 내 꿈을 놓아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사랑과 인정, 보호를 받길 원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며 놓아버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사람'을  '내 심장에 무해한 사람'으로 재정의했다. 

   한 가지를 잃었지만 다른 것은 얻었다. 자유여행의 매력이 예상치 못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처럼, 결혼이란 자유여행에서 의도치 않은 행복을 찾았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생각만 하다가,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각오와 계기가 생기고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은 결혼과 출산 후였다.  

   꿈꾸었던 달달하고 같이하며 나누는 결혼생활은 아니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 또 다른 꿈이었던 글을 쓰고  사색하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감정교류가 중요하고 상상력이 풍만한 이상주의인 나에게 핑크빛 연애세포는 파괴되었지만, 내가 다소 부족한 현실감각이나 문제해결 능력 등은 지금의 남편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그렇게 울타리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보다는 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도전정신을 더 즐기게 되었다. 거실에서 함께 영화 보고 맥주 한잔 하는 친목 도모시간보다는 내 방에서 혼자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는 게 더 편해졌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맘만 먹으면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것 같고, 장래희망이 대통령인 게 흔하다. 하지만 점차 경험과 지식이 쌓여가며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새로운 목표를 찾아내서 다시 매진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내 어린 시절 꿈꾸었던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이제는 완전히 놓아주고, 내게 주어진 현실과 조율하며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야 할 시기인 듯하다. 

   남편의 우스갯소리처럼, 한때 내가 사랑했었던 전 남자친구는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할 만큼, 현 남편과 구 남자 친구는 많이 다르다. 달라진 게 사람이든, 그 사람을 보는 내 시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과거에 머무르기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버젓이 살아있는 본인을 죽었다고 표현하는 저 유머러스함을 보라. 그래, 나도 이제 그는 죽은 걸로 치고, 전 남자친구는 깨끗이 보내줄게. 안녕.  


  요즘 반팔십 평생 안 하던 운동을 한다. 최근 3달 동안 평생 했던 운동보다 더 많이, 격하게 매일 몸을 움직이고 있다. 운동할 때 숨차고 힘든 건 당연하고, 운동 후에도 안 쓰던 근육들이 존재감을 뽐내며 아우성을 치는데,  이렇게 아플 거면 차라리 운동 안 하고 아픈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그만큼 저항이 크다. 한두 시간 땀 좀 흘린다고 없던 복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무심히 습관처럼 아침에 눈떠서 헬스장에 간지 3개월 만에 인바디가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운동의 효과를 보니 그동안의 내 시간과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게 기쁘고, 또 그 맛에 운동을 간다.

운동 전과 달라진 게 많진 않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장지방수치(Visceral Fat Level)가 3단계에서 2단계로 내려갔다. 하하

   

  나에게 결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삼십 년 가까이 다르게 살았던 사람과 맞춰가며 사는 게 쉽지 않다. 행복해지려고 한 결혼인데 이렇게 계속 살다 간 제명에 못 살 것 같은 불안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남들은 또 괜찮게 사는 거 같은데 유독 나만 이런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침에 눈뜨자마다 생각 없이 헬스장으로 가듯이, 노트북 앞으로 달려가 글을 쓴다. 특히나 이 글들은 나의 결혼생활에 대한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한 운동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유산소처럼 지구력을 요하는 것도 있고, 때로는 근력운동처럼 순간적인 극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 노력과 시간이 쌓여서, 누구의 착한 아내가 아니라 함께 살지만 혼자 있어도 온전히 괜찮은 내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맛에 (아직까진) 이혼 안 하고 산다. 

운동 중 하얀 거짓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시간은 끝나기 5분 전이다.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가지만 막상 지나고 보면 금방이라는 게 결혼과 닮았다. 

   

  헬스장에 가면 트레이너 선생님의 달콤한 거짓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마지막', 미국에서는 'Almost there'이다. 저 말뒤에 곧 '하나만 더', '10 seconds left'가 따라 나오지만 그 말 덕분에 한 번 더 손발을 휘적일 힘을 낸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시련의 고비마다, 이젠 진짜 마지막이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버티면 또 다른 길이 열리기도 한다. 

  따라서 후천적 비혼주의자인 나는 결혼을 해야 하냐는 물음에 대답으로 과거에는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결혼의 쓸모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이미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을 감안해서 말하자면) 유명인 명언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눈을 반쯤 감아라.'으로 나의 대답으로 갈음하고 싶다. 거기에 '반쯤 눈을 뜬 상태로 최대한 (억지로라도) 좋은 점을 찾아보라', '잘 안되면 눈을 질끈 감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실눈을 떴다가 영 아니면 눈을 감았다가를 반복해도 괜찮다고, 나를 포함한 모든 기혼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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