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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킨디센터 Mar 24. 2020

내가 아는 개, 혁구를 떠나 보내며

[안녕, 혁구]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서울혁신파크의 출근견 혁구가 곧 집 강아지로 변신할 예정입니다. 지금 혁구의 출퇴근을 담당하고 계신 분께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면서 혁구를 입양하기로 했기 때문인데요.

혁신파크를 떠돌던 강아지에게 십시일반 마음과 정성을 모아 '혁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쉴 곳을 내어준 '혁신견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혁구를 떠나보내며 안녕의 인사를 전합니다.


혁구야, 그 때 기억 나니?

노을 바라보는 혁구(왼쪽), 자유견 시절 혁구(가운데), 심쿵 혁구(오른쪽)_사진: 바다

바다

혁구야, 난 네가 '피타'로 불리던 시절- 느티나무 계단에서 처음 널 보았지. 그때 넌 마치 시인처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세상을 초월한 개처럼 세상을 관조하고 있었어. 가까이 다가가도 짖지 않았지. 곁에 놓인 밥그릇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어. 네가, 크리킨디로 처음 왔을 때.. 사진을 찍으려 다가간 내게 갑자기 훅 달려와 안길 때 그 짜릿함과 감동이란...
그랬던 네가 변심하여 짖기 시작했을 때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낯선 이들의 들고남이 많은 공간에서 살아야 했던 너의 고충도 이해한다. 파쿠르 수업 때 주위를 배회하며, 폭염이 있을 때는 태국에서 보았던 개처럼 온몸을 늘어트리고 누워있던 모습도 기억한다. 며칠 전, 그때 너의 사진을 보았지. 자유견이었을 때 넌 참.. 생동감으로 넘쳤었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준 만큼, 떠나서도 그런 생을 살아가길. 넌 몸에 아무것도 없는 게 어울려. 목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인간과 공존하는 세상에서 목줄 하나 정도는 예의상 액세서리로 하자. 다른 지역구에서도 한껏 너의 자유로움을 뽐내렴. (사실, 노랑 우비도 잘 어울렸어.)



2018년 4월 25일 밤 10시쯤, 언덕을 빠르게 걸어가던 (구)이름 모를 강아지, (현)혁구. "혁구는 항상 빨라요. 사람 손에 닿지 않고 싶은 듯 빨랐어요."_사진: 무브

무브

사진을 찾아 보니 제 첫 기억은 2018년 4월 25일 밤 10시쯤이네요. 물론 그 전에도 만났습니다. 첫 인상은 두 가지 장면이 있네요.


1)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혼자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근처에 가자 지레 발을 빼며 피했습니다. 직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면 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를 피하기 전에 제가 먼저 피해서 들어갔습니다. (이상한 장면이긴 합니다...)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중에는 제가 피해서 들어갈 때, 더 이상 저를 피하지 않더라고요. 만질 수는 없었지만, 한 번은 슬금슬금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름이 없던 혁구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름 모를 강아지와 함께 나무 데크에 앉아서 같이 먼 곳을 보는 경험은 새삼 재밌는 순간이긴 하네요.


2) 갑작스러운 폭염에 모두가 더워할 때 직장 근처 지인과 우연히 산책을 하면서 본 혁구는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있고 눈에 띄게 여윈 모습이었습니다. 누군가 둔 사료와 간식도 남아있고, 무엇보다 정처가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이즈음에 혁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혁신파크에 삼삼오오 생겼던 것 같아요.


저는 혁구에게 크게 환영받진 않습니다. 어제는 반가워했는데 오늘은 짖곤 해요. 검은색 옷을 입었다는 이유, 향수를 뿌렸다는 이유, 발소리가 크고 가끔 전동퀵보드를 타고 빠르게 지나간 이유, 큰 짐을 들고 오가는 모습 때문일까요? 혁구 주변인 중에 제가 키와 덩치가 제일 커서 그런지 위압감을 느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기도 합니다.(제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는 혁구에게 수년째 낯설고 이상한 사람이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건드리는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큰 환영은 못 받아도 급한 용무가 있거나 정 심심할 때 마지못해 만나는 친구 같은 사이이긴 합니다. 마침 제가 크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 편이라 뭐, 제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혁구를 드넓은 들판으로 데려다줄 수 있었다면 그걸로 괜찮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0년 3월 20일입니다. 거의 2년째로 접어들어 가네요. 오늘은 화장실에 다녀오지 못했다는 얘기에 같이 나가보자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간식도 소용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망치진 않습니다. 쓰다듬으면 불편한 표정은 아니에요. 그에게도 마음을 둘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니 뭐 그걸로 잘 된 거죠! 


혁구가 오늘 저를 보자마자 꼬리를 흔들다 만 것은 아마 오늘 제 모습이 혁구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옷이 좀 까맣습니다. 근데 저한테는 급할 때만 소리치고 꼬리 흔들고 떼를 써요. 저는 급한 용무 처리 맨... 입니다. 소방관정도라 생각해주면 저는 아주 뿌듯하겠어요.

어딜가든 그 곳에서도 혁구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잘 가요 혁구.



산책할 때 볼일을 보고 나면 뒷발로 흙을 '파바바박' 찹니다. 뒤에 서 있다 난데없이 흙세례를 맞으면서도 저와 동료는 매번 배꼽 빠지게 웃고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요. 사진: 정인

정인

일 때문에 힘들고 답답할 때마다 혁구와의 산책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혁구와 함께 한 산책과 단톡방, 크리킨디 혁구집 모두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입니다. 혁구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혁구야, 누나가 너 이름 지어준 사람이야! ㅎ_ㅎ 



2019년 4월쯤에 오디세이 친구와 찍은 혁구 사진. 혁구 귀 옴뇸뇸 하고 싶었는데 록이 제지해서 못했던 기억이 있네요._사진: 야호

야호

혁구 안녕? 나는 야호라고 해. 너랑 산책 한 번도 못하고 너가 간다니까 조금 슬프다. 내가 크리킨디센터 자주 갈 때는 너가 없어서 많이 못 보고 못 놀았는데 너의 귀는 정말 보드라 왔어. 귀여워 혁구야. 나보다 나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르겠다. 간식도 한번 못 줬네. 아무튼 가서도 잘 지내고 너무 짖지는 마. 너 맘이긴 한데 같이 사는 사람도 배려해 줘야지 알겠지? 행복하고 재밌게 살렴. 언젠간 또 봤으면 좋겠다. 넌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 알라뷰!




찬스

그렇게 아쉽지는 않을 줄 알았다

하필이면 떠날 즈음에야 친해져서

지난 시간이 미안하다 


떠날 때가 되니

그렇게 짖어대던 너가

모든 낯선 이들로부터 우릴 

지키려 그랬나 싶기도 하다


산책은 너가 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어서  

매번 그렇게 우릴 데리려 나가려 한 건가 싶기도 하다 


이제야 너가 왜 출근견인지 알겠다  

살아있지도 않은 화면들을 보고 사는 내게  

잠깐씩 살아있는 너를 만지는 것으로 위안이 되었다  


너에게 가는 월급이 내 통장으로 온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 세상을 따듯하게 하는 것은  

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데  

돈을 구하지 않아도 삶에 충실하게  

살면 좋겠다 너처럼  


모두에게 꼬리를 흔들지는 않으며 

누군갈 사랑하는 방법도 알고  


그래서 너를 안고 있으면  

참 따듯했나 보다 

가지마라  


따듯한 위로, 산책할 낭만, 살아있는 것을 쓰다듬는 감각이 통째로 이사가는 듯하여 마음이가 안 좋다 

사실 내가 추운 거 안 좋아해서 날이 따듯해지면 맨날 산책 가려고 했단 말이다


혁구야, 잘 가


혁구야 비록 너가 나에게 짖어도, 난 너가 좋았더라. 옷이 어두워서 그런가 해서, 밝게 입고 가도 너는 짖었지. 향수를 뿌려봐도 너는 짖었지. 무엇이 나와 너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 고민했어. 그래도 이따금씩 곁을 내어주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나는 너가 좋으다. 건강하고 또 어디선가 만나자.


쏭쏭

너랑 아직 친해지지도 못했는데 혁신파크를 떠난다고 하니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든다. 여러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도 좋을 일이지만 누군가의 포근한 집에서 자라는 게 아무래도 너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겠지? 앞으로 살면서 힘들거나 우울한 마음이 들 때면 너를 지켜봐 주고 걱정해준 사람들을 기억하며 힘내길 바라. 행복해, 혁구!


show

짧지만 긴 기간 동안 크리킨디로 출근한 혁구에게 고마움과 아쉬움을 전합니다. 반가워서, 심심해서, 화가 나서, 한결같고 꾸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그대를 기억합니다. 새로운 곳에서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건강하게 지내길!!


혁구.. 나만 보면 짖던 혁구.. 네가 짖던 소리가 처음엔 정말 무서웠는데 히옥스 앞에선 얌전한 너를 보며 정말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혁신파크에서 지내는 동안 네가 충분히 즐거웠다고 믿고 네가 어디에 가서든 더욱 행복하길 바랄게. 다음에 만나게 되면 간식이라도 가져갈게 혁구야!


지디

혁구야 넌 참 귀엽고 착해. 앞으로 신나게 살아~



파크를 떠도는 개. 

불리는 이름은 많았지만 

사실 그냥 아무개.


어느 날, 갑자기

그 개는 모두의 개가 되었다.     


집을 지어 주고, 

잠을 재워 주고, 

줄을 잡아 주고,

누구의 개도 아닌 그 개 곁에

언제나 모두가 있었다. 


하얗던 털이 누래지고, 

까맣던 코가 뽀얘질 만큼

...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의 개는 이제 

누구의 개가 된다.

굿 바이- 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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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견을 지켜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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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쏭
크리킨디센터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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