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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킨디센터 Mar 24. 2020

내가 아는 개, 혁구 관찰기

[안녕, 혁구]

나는 혁신파크에 2018년 4월 말일에 왔다.


이곳에 내가 먼저 온 건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혁구가 이곳을 먼저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뾰족하게 바짝 선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귀, 이마부터 코끝까지의 라인이 그림 그리기 좋게 아주 잘 생기고, 뭔가 아련하고 생각 깊은 눈망울. 얼굴만 보면 영락없는 진돗개처럼 생겼으나 진돗개라고 하기엔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긴 웰시코기 체형. 얼굴과 몸의 조화가 뭔가 믹스매치. 큰 개 같지만 크지 않고, 작은 개라고 하기엔 작지 않은. 이 오묘한 매력의 혁구는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늘 내 시선을 가져가 버렸다.


귀여우면서 본인은 잘생기고 늠름하고 멋진 줄 아는 타입

늘 점심을 함께하는 동료 덕분에 혁구를 알게 되었고, 반려견을 기르는 동료를 따라 강아지와 산책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고, 그렇게 혁구의 리드줄을 처음 잡은 날은 2018년 11월 20일.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나는 할 거 다 하고 가련다' 하는 타입

혁구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자유견 시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상처가 생겼고 일단 경계하고 보는 성격으로 스스로 자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나는 강아지를 키운 경험도, 강아지에 대한 지식도 없고, 친해지는 법도, 놀아주는 방법도 잘 몰랐기 때문에 친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색하고 뻘쭘할 땐 괜히 장난감에 집중하는 척하는 타입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나와 산책할 때는, 혁구가 자유로운 영혼처럼 파크를 누비던 자유견 시절 그랬던 것처럼 혁구가 원하는 곳은 다 갈 수 있도록 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말 되게 안듣는 타입

파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상하고 험한 파크 뒷산도 가보게 되고 시간이 여유 있는 날은 북한산 둘레길 언저리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혁구 덕분에 주기적으로 산책을 하다 보니 나도 혁구와 함께하는 시간 만큼은 스트레스를 해소 할 수 있는 엔돌핀이 폭발하는 시간이었다. 


두세 달쯤 지났을까. 


혁구도 점심 산책 시간을 기다리고, 나도 점심 산책 시간을 기다리고. 

반겨주는 혁구를 보니 점심 산책을 안 해주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라는 생각에 추워도 일과를 미루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는 거라고 착각했던 사진(히옥스님 사진)

혁구와 산책을 함께한 지 서너 달, 나에게도 마음을 조금 열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도 보여주고 내 곁에 편안히 앉아 쉬기도 하고, 기다려 달라고 하면 잘 기다려주고. 동물과 유대감을 나눈다는 게 이런 건가. 혁구는 내게 처음 동물과 친해졌다는 감정을 갖게 해준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혁구가 처음 편하게 웃어보였던 순간(좌), 기다려달라고 하니 기다리는 혁구(우)

친해지고 보니 혁구는 감정 표현이 확실한 강아지였다. 좋고 싫음이 확실하고, 원하고 원하지 않음이 분명한.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할 때는 힘이 황소가 돼서 나를 끌고 다니고 날이 좋고 흥이 넘칠 때는 산책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고, 돌아가지 말자고 떼도 많이 부렸다. 


돌아가기 싫을 때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
원하는 게 있을 때는 표현이 확실한 타입

혁구는 산책할 때 주로 풀 냄새, 꽃 냄새, 바람 냄새 맡기, 앉아 있는 새 쫓아내기, 날아가는 새 쳐다보기, 꿩, 고양이 쫓기 등을 한다. 강아지들이 산책할 때 냄새 맡는거야 당연하겠지만 혁구는 특히 풀 냄새, 바람 냄새 맡는 걸 좋아한다. 어떨 때 보면 얘가 정말 자연을 너무 좋아하고 바람을 느끼며 사색이라도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혁구와 산책할 때 행동과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



냄새 맡는 순간을 즐길 때
새를 올려다 볼 때
멀리 내다볼 때
기분이 무지 좋을 때
멋있는 척 할 때

그리고 혁구는 자기의 의사를 밝히는 몇 가지 표정이 있다. 


밖에 나가고 싶을 때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
뭔가 맘에 안 들 때
어쩌다 기분이 좋아 같이 셀카 찍어 줄 때


새삼 혁구에게 이렇게 다양한 표정이 있었나 싶다.


산책 끝났다고 돌아가자고 할 때 말도 참 안 듣고, 고양이나 새라도 만나면 시비 붙은 친구 뜯어말리는 것처럼 타일러줘야 하고, 숨차게 뛰며 놀아줘야 하고, 깨물깨물 어리광도 다 받아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삐뚤어지지 않고 행동에 선을 넘지 않는, 배려의 마음을 아는 혁구가 무지무지하게 귀엽다. 


혁구를 만나게 된 후로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평소에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동물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을 피할 수 없던 시간. 사람과 동물이 함께 공존하기 위해 바꿔나가야 할 것들, 만들어 가야 할 것들, 없애야 할 것들.. 


배우고 알게 된 것이 너무 많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걸었던 파크 뒷산, 기록원 산책로, 공유동 옥상. 그리고 언제나 늘 옆에 있던 혁구. 함께 갔던 그곳에 언제나 혁구가 있을 것만 같다.


어떻게(무슨 이유로) 혁구는 이곳에 와서 우리를 알게 됐을까. 떠돌이 개였던 혁구가 마음을 열어 사람들과 친구도 되고(좁고 깊은 사교성이지만), 은평구의 섬 같던 파크에서 혁구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어 ‘혁신견을 지켜보는 사람들'과도 인연을 맺게 해주고, 테라피독이 되기 위해 배움의 고된 시간을 겪어내고 기특하게 시험도 통과하여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개가 되고… 그리고 이제 혁구는 자기의 마음도 내려놓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구보다 혁구를 아껴주실 좋은 분의 평생 반려견이 되었다. 이런 우연처럼 운명 같은 일화가 내 인생 중 한 켠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혁구와 산책하며 일 년 반을 보내면서 이제 겨우 두 살인 혁구의 인생살이를 보자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절로 마음에 떠오른다. 그간 나에게 있던 힘든 마음을 혁구에게 의지하며  잘 버텨냈듯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닌 혁구를 떠올리며 나도 남은 파크 생활을 잘 해내기로 마음먹어본다. 


이 글을 빌어 혁구를 받아주신 정민님 댁 가족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간식도 뺏어 먹는 혁구를 자기 방석에 자리 내어준 방글이에게도. 


다신 없을 좋은 경험과 많은 배움을 준 혁구.


안녕, 혁구. 

고마워.


작성자

이은한
혁신견을 지켜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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