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와 악의 사이

성희롱에 질린 여행자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아쉬움

by 김역마

인도 여행 중 우다이푸르에서 푸쉬카르로 가는 버스 안.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는 저 멀리 앞에 앉았고 내 옆에는 한 인도인 남성이 앉게 되었다. 똘망똘망한 눈에 큰 키를 가진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너 외국인이지 어느 나라에서 온 거야??"


공대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평소 영어로 말할 수 있을 때가 잘 없어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며 상당히 살갑게 다가왔고, 우린 때아닌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그의 그런 미소와 달리 나는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내가 가는 방향의 종점인 아즈메르 게이트까지 간다고 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장거리 버스에서는 이런 간식이 필수지! 맛 좀 볼래??"


첫 입국 당시 택시의 물괴담이 떠올라 거절하다가 끝내 한 입 먹은 과자 한 조각은 매콤하니 딱 내 입맛이었음에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 그와 단답형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끊어가고 싶어 하는 나. 끝내 그도 눈치를 챘는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힌디어로 쓰인 전공서적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타인 특히 남성의 접근이 반갑지 않았다. 시작은 자이살메르라는 도시부터였다.


어둡고 구석진 골목에서 나를 바라보던 남자. 그가 가디사르 호수 앉아있던 나에게 다가와 전한 한 마디.


"나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친구가 like와 love의 뜻을 구별하지는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 초면에 like도 무리가 아닌가? 당황한 나는 있지도 않은 여자 친구가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으니 너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며 열정적으로 설명한 뒤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시작은 그냥 가벼운 해프닝일 수도 있었지만 성희롱은 계속되었다.


"너 여자야??? 아, 게이구나. 브이넥에 혜나를 그린 팔. 거기다 여자 바지에 단화라니 말이야. 남자 좋아하면 내가 잘하는 애 하나 소개해줄까???"


이게 버스표를 파는 놈이 할 소리일까. 훗날 알았지만 남자든 여자든 인도를 여행하는 모든 이들이 즐겨하는 혜나와 알리바바 바지 혹은 똥 싼 바지 모두 여자만 하는 거였다. 게 말해 그들에게 있어선 난 여장 남자와도 같았다. 물론 이는 외국인이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행하는 노골적인 성희롱이었다. 이에 대해 팔을 걷어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식으로 화를 내봤자 그들은 영국식 조크인데 왜 그러냐며 오히려 나를 조롱할 뿐이었다.





여기에 마지막 정점이 있었으니 우다이푸르의 멋진 호수 즐길 수 있는 배 선착장이었다.


"한국인이지? 너 자이살메르의 OO알아??내 절친이지. 하하하. 인도는 어때?? 오늘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을래???"


다른 이의 이름을 빌린 의는 최고의 경계 대상이다. 나는 그저 배를 타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 주변에 있던 남자 5명이 다가왔다.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야, 너 오늘 밤 조심해. 이 친구 게이거든. 너도 뭐 좋아할 거 같긴 한데 말이야.... 아, 그리고 크림은 꼭 준비해. 많이 아플 테니까 크크크."


대낮에 그것도 관광지인 선착장 앞 상점이 모인 넓은 공간에서 6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인 채 당하던 성희롱. 어디를 봐도 사악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는 놈들. 배를 타기는커녕 더 잘못되기 전에 그들의 악의가 가득한 미소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소름 돋는 기억에서 돌아와 다시 버스 안 내 옆의 인도인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시작하려 했고 그때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경험은 충분한 학습이 되었고, 알 수 없는 선의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건 당연했다.


시간은 흘러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눈에 띄게 커진 마을들이 창밖으로 흘러갔다. 그때 분명 종점까지 간다고 알았던 그가 갑자기 짐을 챙기며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진!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앞으로 멋진 여행을 이어가고 좋은 추억을 한국으로 가져가길 바랄게!"

"나도... 반가웠어. 안녕."


그는 5시간 전에 딱 한 번 말했던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의 이름에 들어간 스펠링 철자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외국인에게는 어려운 발음인 '동진'을 정확하게 발음한 그는 여전한 미소를 더불어 악수와 함께 떠나갔고, 버스엔 내 오른손의 따뜻함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그와 상관도 없는 일 때문에 오해하고 의심했다. 대화를 피하는 나와 달리 그는 인생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내 이름을 얼마나 많이 머릿속으로 되내었을까. 옆의 빈자리를 바라보자니 그는 간단한 질문에도 성심껏 답해주었던 것이 떠올라 더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이미 그는 버스를 떠난 뒤였다. 깊은 어둠이 찾아온 버스 안은 겨울철 특유의 일교차와 함께 추위로 가득했지만 나는 오른손에 남은 온기로 인해 후끈하다 못해 얼굴마저 뜨거워져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선의 구별하는 건 분명 여행자의 몫다. 때로는 선의를 믿다가 크게 당하기도 하고, 악의로 오해해 다른 의미로 크게 당하기도 한다. 자가 분노로 이어진다면 후자의 경우는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이후 의와 악의 사이의 줄다리기를 할 때 나는 그처럼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고 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놀랐던 것처럼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받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이름만은 기억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내 차가운 손에 전해진 그의 따뜻함만큼은 흉터처럼 또렷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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