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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Jan 16. 2023

[상념] 미경험의 소치,

날씨 요정은 실존했다,

나이를 먹었지만, 나이가 먹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우러러 바라보던 그 성숙한 나이의 철없는 장년이 되었지만,

그때 바라보았던 어른들처럼 늙어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샛주황의 트레킹화를 등산화라고 우기며 이 산 저 산 철 없이 다녔다.

하지만, 트레킹화는 말 그대로 등산화가 아니었다. 오르막 내리막을 휘리릭 뛰어다닐 때면 한 두번은 꼭 어김없이 "아이고" 소리를 단말마처럼 내었다.

미끄러웠다, 많이.

결국 탈아재 프레임에 갇혀 "아이고"만 내뱉던 나를 보다 못한 친구가 등산화를 손수 골라 주었다.

날개가 생겼다.

허영에 빠진 이카루스와는 달리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추웠다. 어떤 산이고 갈 수 없었다.

그저, 집에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몇 번을 미루다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제도 어제도 비가 왔다.

하염없이 눈이 내려도 모자란데, 비가 왔다.

후두두 쏟아지는 비에 찐흙이 가득한 산길이 떠올랐다.  

먼지 대신 설렘만 그득 묻어 있는 새 등산화가 걱정되었다.

근데, 내가 가진 건 등산화였다. 그저 '등산'화였다.  

그래 가야지, 날개를 펼쳐야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집을 나섰다.



산의 초입,

스멀스멀한 겨울비는 겨우 그쳤지만, 습습한 공기는 산과 나무, 그리고 돌멩이처럼 굳어 있는 나마저 휘어 감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은 시작부터 늪에 가까운 진흙길이 기일게 펼쳐졌다.

새 신발에 눅눅한 흙이 눈치 없이 묻을 때마다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

내려놓아야 하는데, 쉬이 내려놓아지지 않는 건, 나란 종의 특성일까,

올라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초입에 있던 에어건을 떠올리며 돌아 가면서 털어내면 되겠지라고 애써 위안한다.


삼십여분 정도 올라갔을까,

진흙길은 점점 사라지고 하얀 눈길이 앞을 가로막더니 점점 농도가 짙어졌다, 새하양, 그 자체였다.

왕국, 겨울 왕국, 내가 미처 올해 와보지 못했던 그 왕국이 자태를 스르르윽 드러냈다.

낮은 산이라 아래고 위고 비만 하염없이 내렸겠거니 했는데,

산은 산이었고, 겨울은 겨울이었다.

등산로가 지워질 정도로 눈은 소복소복 쌓여 있었고, 미처 푸른 옷을 벗지 못했던 소나무는 하릴없이 눈꽃을 그득 피워내고 있었다.


"이 눈길에 아이젠도 없이 올라가네, 내려올 때 미끄러울 텐데"

한 촌부의 걱정에 '네... 헤ㅎ..' 라며 말을 흐리곤 그의 걱정을 한 짐 어깨에 묵직이 올리고 묵묵히 올랐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전에 온적 없던 겨울산의 내음이 소소히 스쳐갔다.

아름다웠다.

전에 본적 없던 겨울의 네 모습이 유유히 느껴졌다.



어느새 새 신발 걱정은 잊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챙기지 못한 아이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겠지? 불안한 눈망울을 두 눈에 가득 채운 채 간간히 내려오는 이들의 발만 보았다.

저 이도 아이젠이 있고, 이 이도 아이젠이 있고, 모두 다 아이젠이 있는데..

아, 저 사람은 없다. 그럼.. 나도 할 수 있겠지?

스쳐 지나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억지로 용기를 짜내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절박함과 처연함을 눈 속에 아로새겨 나갔다.



Serendipity,

정상은 마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인 세렌디피티 같았다.

보통의 산은 정상 직전이 가장 가팔라 힘듦이 최고조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 왔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여긴 달랐다, '어? 어?? 다 온 건가? 어! 그러네!'였다.

그 찰나에 의외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마치 질퍽한 산길을 그리며 온 내게 새하얀 눈꽃 산행을 안겨준 날씨 요정처럼 말이다.



하산길,

아이젠을 착용한 채 자신 있게 툭툭 뛰다시피 내려가는 이들을 보면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겨울산은 비 예보가 있더라도 눈을 대비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임에도, 겨울산을 마주해 본 적이 없어 막연히 비만 피하면 된다 생각했다.

어리석다 생각할 수 있지만 어려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이를 먹었지만, 어리다.

어리다, 나이만 먹었기에.



수북이 경험을 쌓고 나면, 어느덧 내 족적을 흐뭇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에서 웬디의 꿈속에 사뿐히 날아든 피터팬처럼,

새로운 일탈을 마저 꿈꾸어 본다.


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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