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감히 노잼도시라고 했나
산과 바다, 첫눈에 반한 순간
밴쿠버에 내리자마자 눈이 멈췄다. 웅장한 산, 끝없는 바다, 그 사이를 채운 도시. 시애틀에 첫발 디뎠을 때의 그 완벽한 기분이 스친다. “이거지!.” 공항을 나서며 속삭였다. 여행의 희열, 짜릿하고 묘하게 서글프다.
시드니와는 다른 맛이다. 시드니가 “우린 항구다!” 하고 외친다면, 밴쿠버는 “우리도 좀 쿨하지?” 하며 눈을 찡긋한다. 항구도시의 활기는 비슷하지만 덜 북적거린다. 관광객이 적으니 이방인인 내가 로컬처럼 섞일 것 같은 착각. 아이러니,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척 걷고 싶다.
도시는 오래된 세월을 품었지만 새것처럼 정갈하다. 건물은 화려하지 않아도 깔끔하다. 리모델링의 묘수일까, 시간을 잘 숨긴 걸까. 조경 속 작은 분수와 폭포가 마음을 끈다. 물소리가 도시의 소음을 지운다. 물을 좋아하는 나로선 점수를 후하게 줄 수밖에.
사람들, 그들의 따뜻한 미소
한국인이 정말 많다. 지나가는 아시아인의 70%는 한국인 같다. 유학생, 워홀러들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그들을 보니 워홀 못 해본 내 젊음이 아쉽다. 부럽고, 저러다 공부는 언제 하나 혀를 차는 아저씨 마음이 스민다. 젊음은 늘 부러운 법.
골프를 세 번 쳤다. 다른 코스, 다른 얼굴들. 다들 어쩜 저리 상냥할까. 영어도 서툴고 공도 못 치는 이방인에게 따뜻하다. 우리나라 골프장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떠오르며 지끈거린다. 밴쿠버의 사람들은 낯선 이를 포근히 안는다.
길 위의 리듬, 시스템의 여유
교통신호는 짧다. 너무 짧아서 무단횡단도, 꼬리물기도 필요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이런 걸 보면 사대주의가 고개를 든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못할까. 한숨. 버스 벨은 줄을 당기면 끝. 직관적이다. 근데 우리나라라면 애들이 마구 당길 거다. 내릴 때 다들 “땡큐”를 외친다. 기사가 듣든 말든. 우리나라에선 반대였던 것 같은데. 또 사대주의에 젖는다.
아쿠아버스는 천재적이다. 통통배를 개조해 열댓 명이 탄다. 두 업체가 비슷한 노선으로 경쟁한다. 오세훈이 꿈꾸던 한강의 그림 아닐까? 마포에서 여의도, 성수에서 잠실까지, 배 하나 띄우면 딱일 텐데. 배 한 척에 얼마 안 할 거다. 서울은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사대주의, 또 한 번.
다만 공공자전거 모비는 실망이다. 서울 따릉이가 압승. 무겁고, 비싸고, 거치대에 딸깍해야 하는 구식 시스템. 10분 타고 3000원이라니. 처음 빌릴 때 안 빠져 바로 반납됐다. 보도는 시멘트에 줄눈만. 캐리어 끌기에 최고다. 길은 밝고 환하다. 사대주의자로서 시멘트에 한 표.
클락션은 시드니처럼 마구 울린다. 위험 경고용이 아니라 성격 급한 소리. 미국처럼 선별해서 울리길 바랐던 내 기대, 어긋난다.
자연의 품, 통나무와 바람
스탠리파크는 완벽하다. 일방통행으로 만든 그들의 현명함에 감탄. 바닷가인데 비린내가 없다. 한강은 근처만 가도 물고기 냄새가 진동인데. 낚시꾼도 안 보인다. 곰이 연어를 잡는 나라인가? 해변의 통나무는 천재적이다. 고목이 의자이자 등받이가 된다. 화룡점정, 이런 거다.
린캐년공원 트레일을 1시간 걸었다. 곰 표지판에 두어 마리 만나기를 기대했지만, 새 한 마리 정도밖에 안 보였다. 살기 좋은 곳에 동물이 왜 없을까. 나무 계단, 미끄러운 곳은 쇠붙이로 마감. 한국의 고무타이어가 떠오른다. 주황색 딱지로 길을 표시한 건 직관적이다. 길 잃을 일 없다. 또 사대주의.
강변을 따라 다들 달린다. 나도 뛰었다. 태어나서 처음, 5킬로를 6분 페이스로 쉬지 않고 달렸다. “Hi, 밴쿠버!” 외치며 밴쿠버의 ‘하이’를 온몸으로 느꼈다. 자전거 헬멧은 법적으로 써야 하지만, 다들 잘 안 쓴다. 안전과 불편 사이, 인간은 부등호를 세운다. 따릉이 같은 저속 자전거에 헬멧은 투머치 아니냐는 분위기.
아쉬움, 그리고 잠 못 드는 밤
지하철역 플랫폼은 아쉽다. 어디인지 대문짝만 하게 써놓으면 좋을 텐데. 찾기 어렵다. 내 영어 가독성이 문제일지도.
시차 적응은 안 됐다. 코스트코에서 멜라토닌을 샀다. 첫날은 좀 잤고, 둘째 날은 잠을 설치다. 결국 안 먹은 날 제일 푹 잤다. 약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나. 해골물이 필요할 뿐이던가
밴쿠버, 마음에 새긴 이름 v
밴쿠버, ‘V’로 시작하는 이 도시는 이름부터 예쁘다.
마음을 훔친다. 또 가고 싶다.
아니, 이미 스며들고 있다.
옅은 가슴속에서.
스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