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rng Oct 10. 2021

[상념] 잘 못 들었습니다

24개월의 처절히 미화된 추억을 떠올리며,

"맞으면서 자랐어요. 엄마는 빗자루 같은 것으로 아무 곳이나 때리셨고, 아버지는 엎드려 뻗쳐를 하게 한 뒤에 엉덩이를 때리셨어요. 근데, 그 시절에는 다 그랬잖아요? 누구나 다 그렇게 자랐죠. 지금이라면 큰일 날 소리지만.." 



요즘 아이를 위해 상담센터를 다닌다. 선생님께서는 양육 태도 가이드를 위해 나의 어린 시절을 물어보셨다. 위의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폭력성이 심각하다 느껴졌고, 그것을 방어해야만 된다고 그 시절은 원래 다 그랬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본 DP가 또 떠올랐다. 






난 무능한 병사였다. 

나 정도 학력이면 편한 곳으로 빠진다는 선배의 말을 굳게 믿고 의경에 지망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중요한 건 나의 학력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맥이었다. 나의 학력을 인정해주어 편한 곳으로 보내진 다는 건 옛말이었고, 편한 곳으로 보내지는 친구들은 모두 아버지나 친인척이 경찰 높은 곳에 아는 분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랬다. 나는 너무 무식하고 순진한 스무 살 어귀 청년이었고, 세상은 나를 혹독하게 가르쳐주었다. 심지어 백일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나온, 한 없이 얼어 있는, 나를 보며 동창회 주소록을 뒤져 중학교 이후 처음 목소리를 마주하는 높으신 동창에게 연락하신 아버지는 아무 소득 없이 전화기를 떨어트릴 뿐이었다. 


난 운동 신경도 없었고, 눈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한 없이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알은 번번이 선임들의 눈알에 사정없이 들키고 말았다. 그런 무능한 병사였다. 

심지어 또래에 비해 2년 정도 군대를 늦었기에 난 무능하고 나이가 많으며 학력은 높아 조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이랬기에 평소 악명 높기로 유명한 선임들도 다행히(?) 막 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겨우겨우 살아나갔다. 


약한 자는 밟히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DP를 보며 명확히 깨달았다. 준호처럼 기가 센 후임은 잘 괴롭히지 않는다. 늘 괴롭힘을 당하는 쪽은 석봉과 같이 조용조용한 이들이다. 쎈 놈들은 귀신같이 그런 캐릭터를 찾아내어 괴롭혔다. 군대에서도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본능인지 아님 우리가 그렇게 사회화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약한 티를 내면 상대는 그의 위에 군림하려 한다.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군대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순간 나 또한 약자로 몰려 고통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DP는 어쩌면 이런 부조리한 인간 군상을 고발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밞음에 지렁이 마냥 꿈틀거려도 결국 마지막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건 석봉이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권선징악? 그건 흥부전에서나 볼 수 있는 조상님들만의 이야기가 아닐까? 


돌이켜보면 신기하다. 

무능한 병사였음에도 나를 챙겨주는 선임들이 종종 있었다. 많은 나이 덕분인지 다소 높은 학력 덕분인지 거칠어 보이는 외모 덕분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 덕에 담배도 안 피고 일도 잘 못 했지만 DP 수준으로 고통받는 군생활을 하진 않았다. 물론 그와 유사하게 고통받으며 생활을 하는 선후임도 있었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힘들고 속상할 때는 어떻게 푸셨어요?" 
"그냥, 참았는데요..." 


그랬다. 상담센터 선생님이 내게 물었을 때, 저 답 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 시절에는 문을 쾅 닫는 수준의 소심한 반항을 가끔 했지만 그것이 결국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기에 정말 가끔 있는 일이었고, 군대에서도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학교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봤자 서로의 군대 무용담을 말하기 바쁘고 남자끼리 이런 속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처해 있는 요즘 그나마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은 것 같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수다도 떨고, 친구들과 운동도 하고, 병원도 다니고... 하며 겨우겨우 풀어내고 있다. 



앞 뒤가 뒤엉켜 글이 엉망인 것 같지만, 이런 플롯 조차 나의 현재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정형화되어 잘 짜인 구성, 간결한 문장, 세련된 단어 선정 등은 지금 나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냥 그렇게 글을 쓰고, 그냥 그렇게 말을 한다. 

그저, 고소한 상황에 고소를 지으며 고소해지길 빌어볼 뿐. 


작가의 이전글 [상념] rhapsody on the roa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