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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Nov 29. 2021

[상념] 연극의 추억,

성스러운 찰나, 유리가면을 기리며, 

지옥에 가보진 않았지만 지독한 지옥을 마주한 나날,

그 자욱한 지옥을 피하고자 잠시나마 도피했던 '지옥'에는 수많은 서사가 있었다. 

정의와 종교, 정치와 사회 그 복잡 다단한 철학적인 이야기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서사에 대해 분석하고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 철학에 몰두하기에 앞서 배우 유아인이 너무나 부러웠다. 

정진수가 시연당하기 전 경훈을 앞에 두고 독백을 하는 장면은 가히 모든 배우가 꿈꿔오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정지된 채, 오로지 핀 하나만 나를 바라봐주는 상황.

낯설고 컴컴한 무대 위에서 나 하나의 힘으로 시간을 몸소 이끌어 가는 그 순간. 


내게 주어졌던 영광스러웠던 추억을 잠시나마 황홀하게 꺼내보고자 한다. 






"자네는 대학로 가서 찌라시 돌려야겠어." 


동아리 지도교수님께서는 첫 연극을 마친 내게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당시 첫 연기에 고무되었던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너의 연기는 대학로 수준이다'라는 칭찬으로 받아들였었는데, 이 에피소드를 전해 들은 어떤 친구는 그냥 네가 웃기다는 뜻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남주인공 페트루치오의 하인 그루미오 역할을 했었는데, 원작 대비 더 익살스럽게 각색되었고 철없던 나는 힐리스까지 신고 등장하며 깐죽댔었다. 그때는 모든 게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신입생 워크숍 공연이었던지라 질적으로 우수하진 못 했던 아쉬움이 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숱한 죄가 그가 저지른 것이라는 건 삼척동자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나의 생에 두 번째 연기, 아직도 대사를 암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내 연기 인생 유일한 원샷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라쇼몽에서 산적을 잡아 관청에 보고하는 경부 역할이었는데 약 2분간 혼자 대사를 쭈욱 치고 들어가는 역할이었다. 총 4회 공연을 하면서 3회 공연 때였나 메소드연기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어떤 느낌이냐면 내가 대사를 치고 있는 모습이 전지적 시점으로 느껴졌었다. 내 몸과 입은 연기를 하고 있는데, 정신은 약간 밖에서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애드립도 자연스레 나오고 이런 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끝난 뒤 선배가 연기에 대해 칭찬을 해주기까지 했었다. 다만, 두 번 다시 이런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 아쉽게도. 



졸업 후 끝난 줄로만 알았던 내 연기 인생은 회사에 입사하고서야 이어졌다, 심지어 주연이었다.

제빵왕 김탁구를 패러디한 영업왕 김탁구, 그룹의 핵심가치를 주입하기 위한 대본으로 만들어졌긴 하다만 내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막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자부심이 그득한 상황에서 누가 주인공을 할지 연출분께서 우리 조에게 묻는 순간 다들 쭈볏쭈볏할 때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너무 쉽게 주연이 되었다. 중간중간에 찬양 조의 노래까지 있기에 (내용은 차치하고) 뮤지컬 배우의 꿈마저 이뤄준 소중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나름 연극동아리 출신임을 자부하며 복식 발성을 하며 연극톤으로 대사를 치며 대강당에서 공연을 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연 공연을 마무리하였다. 






연극무대 위가 아니라도 우리는 숱하게 연기를 하고 있다. 

물론, 나도 지금 괜찮은 척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연기를 너무 잘 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대한 갈망은 너무도 짙다. 

지금도 착한 사람인양, 친절한 사람인양, 좋은 사람인양 연기하지만, 무대 위의 연기는 이런 일상 속의 연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아마도, 오로지 세상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부디 무대에서 다시 연기할 기회가 오기를 소소히 바라보다,

부디 무대 밖에서 다신 연기할 기회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연극이 끝나지 않기를, 

연극이 마침내 끝나길.


추억을 한 올 한 올 벗겨내며, 

추억을 한 움큼씩 지워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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