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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Feb 21. 2022

[상념]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일까,

90% 확률로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근데 의사로서 말하기 참 애매해요.
종양인지 아닌지는 MRI 확인해야 되는데 아닐 가능성이 너무 높아서...




지난주 2주 전 등산의 여파로 허벅다리가 아파서 찾아간 병원, 엑스레이를 보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른쪽 넙다리뼈 머리에 동그란 하얀 음영이 명확히 들어차 있었다. 

대충 500원짜리 동전 크기 정도 되려나,



90% 정도로 아무것도 아닐 거다,

10% 확률로 종양일 수 있다,



같은 말이지만 참 다른 느낌이다,



물론 난 암보험도 가입했고 종신보험도 있으니 고작 10% 확률로 MRI를 찍어볼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난주 열심히 보았던 미드 하우스 시즌 8이 약간의 불안감을 안겨주긴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미드 하우스를 즐겨 보았다,

워낙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인데 난제를 기상천외하게 풀어가는 하우스가 특히 흥미로웠고,  

조금씩 삐뚤어진 캐릭터들이 묘하게 현실적이면서 과하게 비현실적인 포인트도 매력이었다.


마침내 시리즈를 종결짓는 하우스의 장례식을 보면서 상념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결국 능력이다. 

하우스가 뛰어난 천재성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좋아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일을 못하면 별로다. 

난 회사에 가족을 만들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동료들과 결과를 만들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절대.

세상에서 제일 착할 것만 같은 하우스의 친구 윌슨도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위험한 장난도 하고 내기도 한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인간적인 캐릭터로 거듭났을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끊임없이 조금은 부족한, 그래서 현실적인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공감을 얻어낸다. 



그럼에도 내 편은 있다.

윌슨과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하는 하우스를 보며 어떻게 그럴까 싶다가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실 나도 일련의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친구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이 친구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말았달까, 

그런데 막상 힘든 일을 겪으면서 친구들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금전적으로도 큰 도움을 받게 되면서 (혹은 받을 뻔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심지어 지금 나는 보증도 서슴없이 서 줄 수 있는 정도라고 감히 자부한다.







아무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하우스의 마지막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난 해부를 꽤나 잘했었다.

중학교 때 인근 대학 실험 실습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rat이라 불리는 큰 쥐를 직접 해부해보았고,

과학탐구실험대회를 준비하면서 개구리, 붕어를 적어도 10마리 이상 혼자 해부했었다.

해부를 잘한 탓에 실제 대회에서도 다른 팀들은 두어 명이 해부에 끙끙댈 때 난 혼자 해부를 했고 같은 팀원들은 그 시간에 다른 과제에 집중하여 더 좋은 점수를 따냈던 기억이 있다.

한참 중2병이던 시절이라 그랬던지 별로 징그럽거나 잔인하지도 않았다.

그냥 한 생명체의 내면을 보며 하나하나 분해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요령껏 잘만 절개하면 피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넌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극진히 순종하여

다군에 합격한 의대를 뒤로 하고 경영학과로 갔다.

그때의 선택이 인생의 궤적을 얼마나 다르게 그렸는지는 이루 짐작할 수 조차 없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 직장의 개념이 무색해지고 전문가가 추앙받는 세상에선 더욱 그때의 선택이 그립다.


서른 초반까지만 해도 우스갯소리로 말했었다.

슈바이처도 나이 40에 의사가 되었대, 나도 가능성 있어.

하지만, 그 경계선마저 넘어버린 지금

하릴없이 대형면허나 따 볼까 하는 망상을 하곤 한다.


이미 지나갔고, 선택을 돌릴 수 없지만 나의 허물 같은 마음을 남겨 본다.

다음 생에는 어마어마한 부잣집 따님의 견묘로 태어나기로 다짐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그 그 다음 생 즈음에는 매스를 들어보고 싶다. (그땐 로봇이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SF는 차치하자)





근데,

그보다 조금 먼저,

지난한 내 인생, 이 생의 일부도 살점조차 남기지 않고 도려내고 싶다.



마치, 

가지 않았던 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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