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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Mar 05. 2022

[상념] How to draw,

나는 왜 그리는가, 왜, 

어라, 이 연필은 심이 매우 두껍네요?
어? 그거? 여행 갔다 사 왔던 건가? 너 가져.




심 끝은 뭉뚱 했고, 몸통은 원목 느낌이었다. 

이 연필을 우연히 받아 들자 막연히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내 그림 실력(?)은 순전히 돈으로 만들어 냈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 정도까지 띄엄띄엄 미술학원을 다녔다. 

왜 다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어머니가 가라고 해서 갔고 그에 대해 전혀 거부감조차 없이 기계적으로 다녔다. 

마치 제자리 목마에 동전을 넣듯 그렇게 미술학원에 회비를 냈고 나의 그림 실력은 미약하나마 조금씩 쌓였다. 


그 결과, 고등학교 2학년 사과 소묘 수행평가에서 반에서 단 2명뿐이었던 만점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었다. 

근데, 막상 돌이켜보면 그림 실력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어떻게 그리면 잘 그리는지 기술을 배웠었고 그걸 상대적으로 잘 살려냈었던 것 같다. 

지금 그려놓은 상태를 보면, 재능은 딱히 없고, 동년배 남학생 그림 실력 + 0.5 정도 딱 그 정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런 추억을 소소히 떠올리며 회사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스걱스걱 나무가 썰리는 소리, 샥샥샥 심을 갉아내는 소리, 

그 자그마한 소리가 내 자리 주변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연필을 깎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마치 칠흑같이 검은 먹을 먹먹히 가는 시간처럼, 연필은 그렇게 자신의 용도를 다하기 위해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가장 자신 있던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필이 HB 였고, 종이가 A4용지다 보니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회사에서의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상사가 그 모습을 보았고, 소리쳤다. 


OO팀장, 얘 일 없나 본대?






그날 밤 온 동네를 다니며 스케치북과 4B연필을 찾았다. 

생각보다 4B연필이 눈에 띄지 않아, 며칠을 걸려 마련하였고, 

문구가 준비되자마자 지난 주말 사과를 그리며 옛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했으나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고,

오늘은 유튜브를 보며 Impossible triangle을 간단히 그려보았다. 

아마 한 동안 마음을 정갈히 해주는 건전한 취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조심스레 해본다. 







"마음 복잡하고 그러면 애랑 같이 그림 한번 배워봐"


경단녀의 위기에 빠져 있는 그녀를 달래고자,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며 미술학원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더 즐거이 다녔고, 자신의 작품을 손수 액자까지 만들어 왔다. 

근데, 그 액자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 당시는 그 액자가 어디 갔나 궁금해하다가도 애써 그 궁금함을 억지로 지워냈었는데, 

이젠 그 액자가 도달했을 것이 확실한 주소마저 머릿속에서 여태껏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지워내고 싶은 이딴 기억들이 떠오를까 걱정이 앞서곤 한다. 

나빴다.

왜 나에게 할 수 없는, 하고 싶지 않은 것만 이렇게 많이 남겨놓은 건지,



새로 산 지우개처럼 모두 새하얗게 지워졌으면 한다. 

끊임없이 지워냈던 수 천장의 사진들처럼 삭제 버튼 하나면 모두 다 지워졌으면 한다. 

깨끗이 지워낸 순수한 종이 위에 내가 아끼는 이들만 하나씩 채워 넣고 싶다. 

이미 망한 인생이 아니길 빈다, 

여전히 그려나갈 여백이 조금이라도 있길 빈다


비운만큼 채워지길,

채운만큼 지워지길,

지운만큼 행복하길,


빌고 또, 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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