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rng Mar 11. 2022

[여행] D-8, 신경쇠약

과연 제 날짜에 갈 수 있을까, 

"뭐야,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 



내가 얼마나 떠난다고 떠들고 다녔는지, 친구들이 하나둘씩 묻는다. 


날짜를 여섯번쯤 바꿨다. 


처음에는 2월말~3월 중순 (딱 지금)

두번째는 4월말~5월 중순 

세번째는 6월초~6월 중순

네번째는 2월중~2월말

다섯번째는 3월초~3월중순

결국 지금은 3월 19일 ~ 4월 4일의 일정이다. 

심지어 어제는 동일 날짜 안에서 세 도시의 일정을 6박-5박-3박에서 5박-4박-5박으로 변경하였다. 


바꿀 때마다 비행기 일정을 변경했고, 

변경된 일정에 맞게 묶기로 한 세군데 호텔의 날짜를 바꿨고, 

렌터카의 일정까지 변경하였다. 


바꿀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열심히 고쳐댄걸 보니 참 부지런하고 의지적이었던 것 같다. 


무슨 매커니즘인지 모르겠지만 비행기는 날짜를 변경할 때마다 세금이 올랐다며 약 10만원 안팍을 더 내라고 하더라. 유류할증료인가? 

다행히 호텔이나 렌터카는 수수료 없이 변경되었다. 








지난 주 정도까지만 해도 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하니 러시안 룰렛을 앞에 둔 병정마냥 여행이 실감되었다. 

남은 8일, 실질적으로 이제 7일, 그 사이 확진이 되어 버리면 나의 여행 일정은 아마도 적어도 2주가 밀리게 된다. 



막상 실감은 나지만, 가서 뭘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릴없이 여행책을 들어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발 가는대로 걷다 오는건가 싶다. 



오래 전이지만 지난 혼자서의 여행을 돌이켜보면, 


얼어붙은 하이드 파크에서 새하얀 백조와 마주친 그 순간, 

리치먼드 파크에서 조심스레 조우한 밤비 한 쌍, 

루브르 박물관 옆의 자그마한 공원에서 잠깐 햇살을 마주하며 앉아 있던 삼십여분의 멈춰진 시간, 

그녀에게 선물할 Tea를 고르던 파리 마리아쥬 프레르 매장의 은은한 향기, 


이런 소소한 찰나가 뇌리에 박혀 있을 뿐.

유명 관광지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다. 

대영박물관을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서 1시간만에 보고 나온걸 보면.. 그랬었던 것 같다. 



아마 이번 여행도 망상에 빠져 모든 순간을 휘적휘적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회사 연락을 꼬박꼬박 챙겨 보며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도 잊지 않겠지, 



생각 같아서는 남은 7일 동안 회사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은데, 

찾아댈게 너무 뻔해서 재택근무를 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2주 휴가 + 1주 재택.. 

이런 호사를 내 평생에 누릴 계획을 하다니 감개무량하기 그지 없지만, 

만약 안 보내줬다면 난 아마 회사를 그만 뒀을거다. 

그 정도로 절박했었고 절박했다. 



주말에는 조금 더 밝은 톤으로 머리 염색을 해볼 작정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시나브로 다가와버린 절박한 순간을 즐겨 보아야겠다. 



부디 무사히 지축을 박차고 떠날 수 있길 간절히 빌어 본다,


정녕, 제발, 정말. 









작가의 이전글 [상념] Vienna coffe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