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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Mar 18. 2022

[상념] 멍,

과연 나는 언제 화려하게 타올랐던가,

나 불멍 하고 싶어
나도 나도!



동료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도봉산의 무수아취라는 곳을 발굴했다. 

3시간짜리 캠핑이라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더할 나위 좋게 불멍 할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한 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불멍은 없었다. 

고기를 구우면서 불을 보긴 했지만, 내 정신은 온통 고기를 맛있게 굽는 것에 쏠렸고 불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질펀하게 기름진 삼겹살은 자신의 마지막을 짜내듯 기름을 뿜어내기 일쑤였고, 환하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들을 환영이라도 하듯 더 거세게 타올라 고기를 거뭇하게 그을리며 삼켜 버렸다. 

이런 와중에 내가 어찌 불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까, 


그렇게 나의 바람은 생을 다 한 희미한 불빛처럼 사그러 들었다. 





인스타 알고리즘에 우연히 불멍 세트가 있었다. 

그래, 이거란 생각에 당장 주문했다. 

사이즈가 작아 화염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천연 에탄올을 사용해 그을음에 생기지 않는다는 상냥하고 세련된 안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화염은 천장을 태울 듯이 화려하게 타올랐고, 주변의 돌과 유리통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순진했다. 





멍, 

결국 멍이 생겨 멍하고 싶은 거였다. 

온몸을 뒤죽박죽 물들인 멍을 밀어내고파 멍하니 있고 싶은 것이었다. 

멍을 멍으로 참아내겠단 생각이 참 아이러니한 표현 같지만, 

언젠가 진중하게, 멍하니 은은하게 숨을 내뱉는 불길을 막연히 바라보고 싶다. 

밀어내는 화염에 검게 물든 재가 하늘을 향해 흩어지듯

내 마음의 멍도 점점 환하게 옅어 흐드러지지 않을까, 





한껏 우쭐대고 있다. 

출국이란 설레는 단어로 인해 주변의 부러움을 한 껏 사고 있지만, 

"얘 어디 갔어? OO 해서 머리 식히러 갔대. 왜 OO 했대? XXX △△이래.. "

이런 대화가 회사에서 여기저기로 오갈까 봐 두렵기도 하다. 

모두가 머리로는 납득은 하겠지만, 결국 나의 못남에 원인을 찾지 않을까 괜스레 작아지고 만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란 심정으로 떠나면서 이런 서글픈 마음, 



멍,

이건 한낱 멍이겠지, 

언젠간 칠흑같이 거무튀튀한 음울한 기운도 모두 빠져나가겠지,

그렇겠지, 




마지막 남은 천연 에탄올 한 방울을 조심스레 쏟아 봐야겠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창에 비친 아련한 불길이 부디 내 눈망울에 붉게 맺히지 않길,

그처럼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지 않길, 


또, 오늘 또, 멍하니  빌어본다,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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