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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Mar 05. 2021

독일 고딩에게 성추행 당한 사건

그것도 임신 6개월에

독일 교포들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를 들여다 보면 인종차별적인 언행이나 폭력사건을 당한 교포들이 꽤 되는 것 같다. 나는 다행히 독일에서 20년 이상 살았지만 생각해보면 인종차별적인 사건을 당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굳이 생각나는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지하철 역에서 생긴 사건이 하나 있다.


때는 2008년, 당시 나는 임신 6개월의 몸(배가 거의 안나와 임신한 표가 많이 나지는 않았음)으로 금요일 오후 3시경 노래교실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지하철이 들어왔고 내가 탈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역에 붙여진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내려 내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거의 다 나갔을 무렵 어느 누군가가 내 사타구니 깊숙히 손을 넣었다 빼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뒤돌아 서서 보니 한 청소년이 손에 잭다니엘 콜라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죄책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머리에 피도 안마른 넘의 자식이 대낮에 대놓고...


한국에서도 성추행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삼각지에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고 도망간 사건, 버스나 지하철에서 당했던 불쾌한 신체접촉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짓을 몰래 했던가 하고 최소한 도망은 갔다. 그런데 이 놈은 도망도 안가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웃고있었다. 괘씸한 죄가 보태졌다.


그 녀석이 아마도 어른이었고 우락부락했고 덩치가 컸더라면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지르고 따라갈 엄두를 못내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 머리에 피도 안마른 넘의 자식은 꽤 만만해보였다. 청소년이었다. 덩치도 크지 않았고, 키도 170을 넘을까 말까해 보였다. 내가 야단을 치면 '잘못했어요.'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따라가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니가 한 짓이 성추행인 거 아니?"


그랬더니 그 아이는 걸음을 빨리하며 도망가려고 했다. 나는 빨리 쫒아가서 그 아이가 입은 후드티를 잡아 당기며 주변 사람들이 들으라고 소리질렀다. 증인을 확보해야할 것 아닌가.


"성추행 당했어요! 경찰! 경찰!"


신고전화가 110이었던가 112였던가. 기억이 가물했지만, 놀라운 건 스무 명이나 될까한 지하철에서 내린 승객들중 누구 하나 내 목소리를 듣고 도와줄 기색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는 것.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내 옆을 지나쳐 역사를 빠져나갔고 마지막으로 나를 지나치던  쌍의 남녀중 젊은 여자 하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얘가 제 엉덩이를 만졌어요. 그래서 성추행으로 경찰에 신고하려고요. 번호가 생각이 안나네요."


그 여자는 전화번호만 알려주고는 지나갔다. 지하철 역에는 그 아이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그 아이의 티셔츠를 잡고 경찰에 전화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정색을 하고는 도리어 화를 냈다.


"증거있어요? 내가 성추행했다는 증거 있어요? 아무 짓도 안한 사람 붙들고 뭐하는 짓이에요?"


처음에는 소리지르고 경찰에 전화하는 척 하면서 겁만 주려고 했는데 놈이 이렇게 시치미를 떼니 더 괘씸했다. 이런 놈은 신고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한다. 누르자.


110


경찰에 전화를 하려고 버튼을 누르며 생각했다. 예전에 독일에서 운전면허를 딸 때, 응급처치를 배우면서 들었다. 경찰에 전화를 할때는 제일 먼저 자기가 있는 위치를 말하라. 현재 위치가 제일 중요하다. 본인 이름이나 사건정황에 관한 것은 나중에 얘기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있는 지하철 역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내가 당한 일을 얘기했다. 전화를 끄지 않고 계속 이동하면서 이동경로를 얘기했다.


경찰의 출동이 그렇게 신속할 줄이야. 내가 지하철 역을 나와 300미터정도 걸었을까... 전화한지 5분정도 경과후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이 들렸다.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해진 것을 깨달은 그 아이는 내게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없었던 일로 해주면 20유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20유로?


20유로가 이 사건에 대한 합의금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수중에 20유로 밖에 없었던지.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겉으로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며 티셔츠를 꽉잡고 계속 따라갔다. 경찰차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 아이는 내 손을 뿌리치며 도망을 가버렸다. 임신 6개월의 몸을 하고 그 아이를 따라 뛰어가기란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놓쳤다. 조금 있다가 경찰차가 도착했고.   


여자경찰이 내려서 내게 사건에 대한 진술을 부탁했다. 한국에서건 독일에서건 나는 평생 경찰과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좀 이상했졌다. 바쁘신 분들일텐데 내가 너무 사소한 일로 신고를 해서 화가 난 건 아닌지, 이 일이 경찰이 사이렌까지 켜고 출동할 만한 일인지 신고를 해놓고도 분간이 안되었다.


그래도 경찰이 물으니까...


나는 사건정황에 대해 줄줄이 설명했다. 성추행범이 잭다니엘 콜라를 손에 들고 있었고 약간 취한 것처럼 보였다는 얘기에서 시작해서 뒤돌아 서있는데 다가와서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갔다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이 손의 위치가 어디까지 갔는지, 엉덩이만 만진 것인지 아니면 항문이나  그보다 더 깊숙히 만졌는지에 대해 물었다. 경황이 없어서 손의 위치가 어디까지 갔는지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진술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니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라고 했다. 나는 아주 깊숙하게 손이 들어왔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여자경찰은 내가 진술한 것을 다 적더니 몸에 혹시 지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현재 임신 6개월이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임신중에는 작은 충격에도 태아에게 해가 미칠 수 있으니 근처의 종합병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 여자경찰은 경찰차로 나를 종합병원까지 데려다주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다. 산부인과 진료실까지 데려다 주는 한편, 간호사에게 모든 정황을 설명해주었다.(이 순간 나는 비록 외국인 신분으로 독일에서 살아가지만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기꺼이 납부하는 건전한 시민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경찰은 이 사건을 정식으로 접수하겠는지 물었다. 나는 정식으로 접수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좀 있으면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통보가 갈 것이며 통보받는대로 출두해서 다시 한 번 진술해야할 거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노래교실로 가려다가 이 상황에 노래부를 기분도 안나고 해서 그냥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입안에서 맴도는, 가슴속에 있는 이것을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집에서 방만구 씨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는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큰일나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면서 야단을 쳤다. 그래도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갔으면 흥분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쯤 노래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텐데 작은 일을 너무 크게 키웠나 싶었다. 게다가 좀있다 경찰에 출두까지 해야되니 얻는 것도 없이 괜한 일만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주 정도가 지났을 때 정말로 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통보가 날아왔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다 잊어버렸을 무렵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경찰서로 가는 일이 귀찮게 느껴졌다. 정식으로 접수하지 말걸 그랬나 하는 후회까지 했다. 그래도 어쩌나 일을 벌였으니 수습을 해야지. 


경찰서에서 나는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참으로 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5분 넘게 얼굴을 바라보며 실랑이를 했던 인데 막상 찾으라고 하니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세상에 웬 등록된 청소년 성추행범이 그리도 많은지. 청소년 성추행범의 사진이 가득한 사진첩을 오랫동안 뒤적거려봤지만 그 놈이 그 놈 같아 그 누구도 고를 수가 없었다. 괜히 엉뚱한 사람을 지목했다가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것 같아 경찰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전혀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고 사진으로 보니 다 비슷비슷해보여서 못찾겠다고. 그랬더니 그 여자경찰은 그럼 신고를 없었던 일로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애가 악질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나중에 미안하다고 20유로 주겠다고 저한테 그랬거든요. 얼굴도 기억안나고, 애도 아직 어리고, 제가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용서해주고 싶어요."


그랬더니 그 여자경찰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용서해주고 싶다고 말씀하시니 더이상 말씀은 못드리겠지만, 원래 성범죄란 것은 진화해요. 이렇게 작게 시작한 애들이 나중에 중대한 성범죄자가 되거든요. 그 애가 나중에 중대한 성범죄자가 될지 아무도 몰라요."


뭐야, 네 시작은 미미했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그 경찰의 말을 곰곰히 곱씹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정상적인 관념이 있는 아이라면 아무리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해도 길에서 모르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질 엄두는 못낸다.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되는 일의 경계가 뚜렷하게 있는 사람이라면 술에 취했다고 해도 그 경계를 감히 넘지 못한다. 술에 취해서 성추행을 했다는 사람은 원래부터 그럴 기질이 있었던 사람이거나, 해도 벌받지 않은 반복된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때 내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갔던 그 청소년은 이제 20대 후반의 청년이 되어있을 것이다. 내가 당시에 성추행범 찾기를 포기한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경찰의 말을 생각해보면 작은 성추행도 댓가를 치르게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나처럼 평소엔 소심한 사람이 사람많은 지하철 역에서 어떻게 소리지를 용기가 난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신기하기 그지없다. 공공장소에서 일을 당하고 큰 소리를 지른 것은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사건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앞으로도 사람많은 공공장소에서 일을 당하면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소리를 지르라는 것이다. 예전에 호신술에 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상대방이 덩치가 압도적으로 커서 체격으로는 몸싸움 엄두가 안날때,


소리를 질러라!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일이다. 경찰서 진술에서 유리하게 작용될 수가 있다. 게다가 의외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상대방에게 위협으로 작용해서 소리를 지르는 행위만으로 상대방에게 겁을 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소리만 질렀는데도 상대가 겁을 먹고 도망을 갈 수 있고, 심리적으로도 상대방에게 니가 지금 심각한 잘못을 하고 있는 거라는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 사는 분들, 소리 지를때는 외국어 문법 끼워맞춰서 완성된 문장으로 말할 생각으로 머뭇거리지말고 나오는 대로 그냥 질러라.(사실, 나한테 하고싶은 얘기임) 한 단어로 말해도 된다. 독일어로 성추행은 Sexuelle Belästigung.


단어가 행위에 비해 너무 점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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