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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Apr 10. 2021

현관열쇠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폐를 끼치는 것도 관계맺기의 일종

어제 방만구 씨가 친구네서 저녁식사를 하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퇴근후 하루종일 집에 있었을 미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나가는 김에 종이 쓰레기를 버려야겠다 싶어서 종이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챙겨 밖으로 나왔다. 종이 쓰레기 컨테이너 앞에서 나는 아차 했다. 내가 가지고 나온 것은 집 열쇠가 아닌 회사열쇠였다. 쓰레기는 통옆에 두고 우리는 긴 산책을 시작했다. 방만구 씨가 돌아올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했으므로.


놀이터를 돌아 밀밭을 지나 옆동네까지 갔다. 대충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닌 것 같았다. 핸드폰도, 지갑도 없이 나왔으니 시간도 알 수가 없었고 카페에 들어가 있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 불가능 하거니와 코로나때문에 테이크 아웃만 가능하기에 식당이건 카페건 갈 데가 없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남편이자 동거인 방만구 씨는 최근에 전화번호를 바꿨는데 나는 아직도 그의 번호를 전부 외우지 못한다. 마지막 두 자리 숫자가 어슴푸레하다. 마지막 두 자리 숫자를 모른다는 것은 전체 번호를 모르는 것과 다를바 없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온 나는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서서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열쇠를 안가지고 나와서 그런데 문 좀 열어줄래요?"


문이 열리고 우리는 집앞 계단에 앉아서 기다렸다. 10분정도 앉아서 미나와 얘기를 하는데 옆집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오래 얘기한다고 불평을 하려나? 하고 내다봤더니 옆집 아저씨다. 그는 영어로 말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면서요? 우리집에 들어오세요. 추울텐데..."


나는 웬만해선 남한테 폐는 안끼치고 사는 성미라 처음에는 안들어가려고 했다. 게다가 밥때 남의 집에 가는 것도 실례고. 그래서 괜찮다고 했더니 저녁식사도 끝났으니 괜찮다며 자꾸 들어오란다.


그럼, 이 기회에 이웃도 사귀고 들어가볼까...


우리는 이 집에서 6년을 살았고 이웃도 이 집에서 6년 이상을 살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오다가다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다. 애들이 미나 또래였다면 애들 때문에라도 왕래가 있었을텐데 이집 애들은 미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어쨌든 그 집에 들어갔다.


남의 집에 들어와 보니 낯선 세계다. 우리집과 구조도 다르고 냄새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이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딸 셋에 두 양주, 5인가족이다. 부인 율리아는 독일인이고 남편 파블로는 외국인. 이들은 영어로 대화한다. 독일에서 13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영어라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없는 사람이다. 파블로의 억양으로봐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 출신인 것 같진 않고. 방만구 씨는 예전에 파블로가 생긴 거나 느낌적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인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가 구사하는 영어에 스페인 억양이 전혀 안들어가있는 걸로 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우리의 추측이 빗나갔다. 그는 브라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가 독일인이고 할머니가 이태리 인이라던가. 하여튼 혈통관계가 복잡하여 조상이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얘기하기 복잡한 그런 외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애 셋을 키우는 집이라 집안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았다. 기저귀를 뗐을 것으로 보이는 제일 작은 애는 벌써 잠들었고 초등학교 1학년 짜리와 어린이 집에 다니는 둘째는 소파에 앉아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켜져있는 컴퓨터 화면을 보니 저녁 8시 30분이었다. 우리가 두 시간 동안이나 밖에서 시간을 때운 거였다. 나는 갑자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이 겸연쩍어 묻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마쿠스가 일찍 자는 사람이라 9시 조금 넘으면 들어올 거예요."


이 집 사람들은 나의 남편을 잘 안다. 우리 아파트 3층에 사는 세 가족들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공동정원으로 내려가 촛불을 들고 함께 캐롤송을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노래부르러 나가자는 걸 코로나로 난린데 무슨 노래냐고, 경찰에 잡혀갈 일 있냐며 나가질 않았는데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었다. 그때 이후로 세 가족들은 통성명도 하고 친해진 것 같았다. 나는 성격상 이웃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거나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타입이 아니다. 사람 사귀는 일에도 에너지가 들어가는 법이라 부산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 알고 지내지 않는다. 이곳 프랑크푸르트엔 아주 드물게 연락하는 한국인 친구 둘과 미나를 통해 알게된 학부모들이 전부다.


우리는 브라질 인들이 왜 소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는지, 한국산 소고기는 왜 비싼지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우리 아파트 뒤에 생긴 컨테이너 초등학교가 예상외로 학부모들의 만족도가 높다느니, 이 아파트에서 이사나간 투덜이 알렉시오 아빠가 여기 살때도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이사들어간 아파트도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거리더란 얘기, 그리고 볼펜심을 열쇠구멍에 쑤셔넣어 문을 따는 사람 얘기까지 했다.


볼펜심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율리아가 뭔가 생각난듯 무릎을 탁 쳤다. 3층에 사는 음악학교 선생이 요전앞새 카드로 문을 땄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장 피에르가 열쇠를 안들고 나갔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카드를 문틈에 집어넣어 문을 땄거든. 한 번 전화해볼까?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각이었고 방만구 씨가 집으로 돌아올 시각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었지 그가 언제 돌아올 지는 나도 몰랐다. 운이 나쁘면 12시가 넘어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이 집에 하염없이 앉아 폐를 끼칠 바에, 아무 잘못없이 엄마때문에 남의 집 소파에 누워 졸려하는 미나에게 폐를 끼칠 바엔 차라리 장 피에르한테 폐를 끼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용수철처럼 뛰어나와 우리가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우리집 현관문에 매달려 문과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모자까지 쓰고.


장 피에르는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밤 10시에 전화받고 나왔는데도 귀찮아 하는 기색없이 도리어 자기가 문을 한 번에 따지 못함에 미안해했다.


"들었지 들었지? 방금 딸깍하는 소리. 이번엔 거의 열릴 판이었는데 아쉽다."


나는 암만 들어도 딸깍하는 소리가 안들리더만 그는 계속해서 이런 소리를 했다. 10분이 넘어도 문이 열릴 기색이 없자 파블로는 아무래도 연장탓인 것 같다면 자기가 집에 가서 쓸만한 카드가 있는지 뒤져보겠다고 들어갔다. 몇 분 후에 그는 카드 두 장을 들고 나왔다. 기한이 만료된 비자카드 한 장과 도이치 반 50 카드(열차패스). 그중 도이치 반 카드를 가지고 문을 열었는데 도전 두 번만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우리는 너무 좋아 환호했다. 거의 네 시간을 밖에서 떠돌다가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살았구나, 홈 스윗 홈!


아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한국에 사시는 분들은 카드로 현관문을 따다니 도대체 무슨소릴 하나 싶을 것이다. 독일엔 현관에 전자키가 달린 아파트가 없다. 글쎄 그런 아파트가 요즘들어 지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독일에서 살아가면서 전자키 달린 아파트 문을 단 한 차례도 보지 못했다. 아파트의 문들은 대략 아래의  사진처럼 생겨서 밖에서 따로 잠그지 않은 이상 카드로 문을 열 수가 있다. 그래서 장기간 집을 비울때는 문을 열쇠로 잠궈줘야한다. 아직도 편지와 팩스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독일답다.



문을 열고난 장 피에르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우리집 말고도 이미 다른 집도 따준 경력이 있다고 우쭐해했다. 앞으로 문을 딸때는 도이치 반 티켓으로 따야겠노라며, 도이치 반의 퀄리티가 이렇게 좋은줄 몰랐다며 껄껄 웃었다.


우리는 약 4년 전 토요일, 가족나들이를 나갔다가 열쇠를 안들고 나온 것을 알고 열쇠수리공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수리공은 장 피에르와 같은 방법으로 문을 딴 후 출장비 포함 80유로인가를 요구했다. 우리 부부는 둘다 어마어마한 똥손이라 이런 문제가 닥치면 스스로 해결해보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조건 사람을 부른다. 그러니 문을 따준 이웃이 배로 고마운 것이다. 생각할 수록 고마워 수고한 장 피에르와 카드를 제공한 파블로에게 케잌을 사다가 선물해줘야겠다.


이번 일로 때때로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폐를 끼치는 것은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이웃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준다. 폐를 끼치는 것도 관계맺기의 일종이다. 내가 폐를 끼치지 않았다면 나는 나의 이웃이 아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사람인 줄 알고 살아갈 것이고 나의 이웃은 내가 중국인인줄 알고 살아갈 것이다.


방만구 씨는? 그는 지금 카드를 들고 나가 문따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도이치 반 카드가 없냐며 주변을 뒤지더니 이케아 카드를 들고 나가 연습중이다. 내가 보기에 방만구 씨는 도이치 반이건 이케아 카드건 열쇠없이는 문을 못 열 사람이다. 어마어마한 똥손이라.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그의 어젯밤 귀가 시간을 밝힌다. 나의 예상을 깨고 밤 11시 35분. 고수가 들어간 맛있는 고기 완자를 먹었단다. 우리가 집밖을 하염없이 떠돌던 그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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