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 바닷가에 뜨거운 밀가루 떡을 흘려놓은 것처럼 주욱주욱 길죽한 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이렇게 길쭉한 섬들이 많은 해안을 나는 여태 본적이 없다.
이 마을한 귀퉁이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아이다 아파트라는 곳이 있다. Karlobag은 관광지로서 특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아이다 아파트는 관광객에게 특별히 매력적인 아파트도 아니다. 여길 왜 왔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라고 말했다가 너무 성의가 없어보여 궂이 이유를 찾으라면 발코니의 빗살무늬가 철 발코니 보다는 조금 더 성의가 있어보여서 정도.) 하여튼 여기서 현재 3일동안 묵고 있으면서 근처 바닷가에서 수영도 하고 오후에는 그릴도 한다.
방만구 씨가 전날 먹다 남아 싸들고온 피자를 다시 데워 아침으로 먹고있다.
아이다 아파트에 처음 들어온 날 나는 왠지 이 아파트가 유럽풍으로 지어진 아시아에 있는 아파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로된 높은 천장, 옛날식 나무바닥, 벽에 걸린 고색찬란한 서양화들,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오는 곳에 있는 나무계단, 발코니로 향하는 유리문의 모습, 발코니의 흰색 빗장의 모습 등.그래서 나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방만구 씨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 꼭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베트남 아파트같아."
"응?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잖아."
"그래도 느낌적으로 그렇다고. 내 뇌에 들어있는 모든 정보의 조합들이 이 아파트를 보고 그렇게 얘기해. 어쩌면 영화에서 봤을 수도 있고."
"무슨 영화?"
"음... 연인? 연인에서. 남주와 여주가 시내 한복판에서 만나서 정사를 나누던 그 아파트가 여기랑 좀 비슷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이런 나무의자를 내가 어렸을 때 동네 기원에서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동네엔 기원이 없었다. 그럼 기원에서 봤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 아파트는 총 4개의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 손님은 우리뿐이다. 그렇다고이 아파트가 우리집 빼고 텅텅 비었냐면 그렇지 않다. 사람들로 득시글 한다. 우선 이 아파트의 주인이자 엘레강스한 할머니가 계신다. 이 할머니는 아침에 잠깐 수영을 하고 돌아와서는 붉은 계열의 립스틱을 바르고 종일 유유자적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얘기를 한다. 우리가 지나갈때마다 인죠이! 라고 말하며 인자한 미소를 띤다.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는 돈버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유고슬라비아 공산 시절과 발칸전쟁 겪은 사람치고, 그리고 그 연세에 비해 영어도 잘하고 상당히 자유분방한 무언가가 몸에 배여있다.
1층에 거주하고 있는 거주자에 의하면 자기는 여기서 장기 거주중인데 손님은 아니고 할머니의 지인이란다. 할머니가 여름엔 여기와서 지내라고 해서 자주 이곳이 온단다. 국적은 할머니와 같은 세르비아 인이다. 그는 외모가 차분하고 정갈하며 영어가 네이티브 수준으로 상당히 유창하며 상식이 많아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해도 막힘이 없다. 짐작컨데 대학교수가 이날까 생각된다.짐작의 근거는 차도 좋은 것으로 타고다니고교수들은 여름방학동안 근무를 하지 않으니.
그 외에도 왔다갔다 하며 쓰레기를 정리하고 고양이 밥을 주는 할머니 한 분이 더 있고, 자주 눈에 띄지 않는 청소년 둘(아마도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듯), 그리고 영어가 유창한 곱슬머리의 건물 관리인이 있다. 상상하건데 이 아파트에서 건물 관리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무전취식자들로 여름을 잠깐 이곳에서 보내려고 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이다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고양이로 곱슬머리 괸리인의 소유. 특징: 용기가 부족함, 일에 착수하기 전에 오래 망설이는 경향. 간이 작아 쥐는 못잡을 것으로 사료됨.
이 아파트에서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건물 관리인이 유일한데 그는 인상착의에 맞게 건성건성 일한다. 그의 인상착의는 20년동안 배낭여행으로 세상을 떠돌다 한 맘씨좋은 호텔주인을 만나 이곳에 종업원 겸 거주자로 눌러앉은 사람처럼 보인다. 전체적인 행색은 93kg 나가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라고 보면 알맞겠다.(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제작한 감독으로아마도 그는 120kg 육박?)우리가 그릴을 하려고 보니 그릴이 깨끗하지가 않아 얘기했더니 부랴부랴 그릴을 청소하였고 정원의 잡초도(잔디가 아닌 잡초) 한 달은 안깍은 듯 부수수 우거져 있더니 우리가 그릴을 하겠다고 한 날 부랴부랴 잔디를 깍았다. 외모상 그는 할머니의 아들은 아닌 것 같다.
그릴이 있는 정원의 모습. 현재 잡풀들이 말끕히 깍인 모습. 그릴 옆에 무화과 나무가 있다. 따먹어도 된다는 말에 우리는 매일 무화과를 따먹었다.
할머니와 세르비아인 교수가 자주 앉아 계시는 건물 입구의 테라스.
집 앞에서 찍은 바닷가 모습. 멀리 벌거숭이 섬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섬이 사막처럼 벌거숭해서 미나는 섬이 꼭 화성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섬 이름은 Pag. 이번주말에 섬에 갈 예정
식탁위에 4등분된 무화과의 모습이 보인다. 방만구 씨가 아침마다 무화과를 따와서 먹는다. 맛은 뭐... 돈주고 사먹을 맛은 아닌듯.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보통 아파트를 세놓는 주인들은 손님의 편의를 위해 조용조용히 다니고 주요 시설물도 손님들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데 비해 여기는 모든 것이 할머니 위주로 돌아간다. 테라스에는 할머니가 늘 앉아 있거나 누워 계셔서 우리가 그릴을 하려면 통보를 해야했다. 그렇다고 그게 불편한 것은 또 아니다. 테라스에서 모로 누워있는 할머니께 똥침을 놔도 할머니는 화를 안낼 것 같다. 그처럼 여기 사람들은 각이 서있지 않고 그 편안한 점이 나를 편하게 한다. 이 아파트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은 왠지 주인이건 고양이건 손님이건 종업원이건 무전취식자건 간에 모두 이 서로를 개의치 않고 지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들 모두 꼭 배낭여행자 숙소에 거주하는 여행자 같은 느낌이랄까. 할머니에게그릴좀 할께요, 하면 그럼그럼 해야지 하고 자리를 비워주고 지나가면서 쓰윽 맛있어? 하고 물어보시는데 전혀 성가시다거나 불편한 기분이 안든다.
이번주 목요일에 이곳을 떠나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숙소들과 비교하면 아이다 아파트는 여러모로 장삿집 같지가 않아 인상적인 곳이다.이 집의 크로아티아 이름은 Aida Apartman.
만나서 반가웠어 Aida, 다음에 또 봐!
PS. 아이다 아파트의 부킹닷컴 이용후기는 8점대로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다. 나도 8점대의 평점을 아이다 아파트에 줄 예정이다. 나는 아이다 아파트가 나름 좋지만 이런 아파트가 9점대의 팁탑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은 높은 평점을 가진다는 건 불공평하다. 세상에는 9점대의 평점을 가진 아파트를 불편해하는 여행자도 꽤 많다. 9점이나 10점을 가진 아파트들은 그 나름대로 불편한 점이 있다. 좋은게 다 좋지는 않다.
아이다 아파트에서 동쪽으로 10분 걸어가면 나오는 해안. 여기 바닷가에서 나는 생전 처음보는 바다 생물체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