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라힘, 그 날 당신은 진짜 아팠나요?
날씨가 어둑해지는 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퇴근길에 늘 다니던 길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물건을 사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한 행색이 초라한 중늙은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나는 동냥하는 사람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쳤으나 그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앰뷸런스를 좀 불러주시오!
거지는 지나칠 수 있겠지만 아픈 사람을 지나치는 행위는 양심에 거슬린다. 게다가 추운 날씨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서 여러 사람한테 접근했다 퇴짜 맞은 사람은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베풀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얘기들을 생각해 내고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아픈 걸로는 앰뷸런스를 부를 수 없어요."
"배도 아프고 설사도 하고..."
"그러시면 근처 종합병원에 가보세요. 거긴 밤새도록 문 여니까 예약 없이 아무 때나 갈 수 있어요."
"여기서 너무 멀어서... 무슨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멀다니? 택시 타고 10분이면 Höchst Krankenhaus가 있는데... 가방도 안 들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온 행색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인 듯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반백에 이빨이 많이 빠져 발음이 헛나왔다. 까만색 재킷에는 콧물 허옇게 말라 붙어있었다. 정신지체 장애인 같아 보이진 않는데 여러모로 혼자 사회생활을 해나가기엔 조금 부족한 사람이랄까... 당연히 혼자서는 종합병원에 갈 줄도, 택시를 부를 줄 모를 확률이 높다. 내가 그의 부탁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는,
"내가 핸드폰이 없어서 그러니 딱 한 번만 앰뷸런스를 좀 불러줘요."
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두통 증상이 가볍다 하여 지나쳤다가 사람 잡으면 어쩌나, 머리가 아픈 데는 평범한 두통일 수도 있겠지만 뇌출혈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앰뷸런스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앰뷸런스가 몇 번이죠? 110인가? 112인가?"
그 중늙은이가 자기도 모른다 하여 나는 슈퍼마켓으로 도로 들어가 빵집에 있는 점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더 그 중늙은이에게 단호한 얼굴로 다짐을 받았다.
"앰뷸런스 부르면 본인이 그 비용 다 부담해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그거 공짜 아니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길래 나는 112로 전화를 걸었다.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용건을 묻지 않고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내가 날마다 여기를 지나다니긴 하지만 이 동네에 살지 않으므로 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아이 참... 전화를 하기 전에 이런 거 정도는 알아뒀어야 하는데...
"길 이름은 모르고요, 슈타인바흐에서 에쉬본 가는 중간에 레베하고 알디 슈퍼마켓 있잖아요. 그 앞에 주유소 있고."
"인더스트리 슈트라세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 슈퍼 앞에 최근에 로터리 공사를 했는데..."
"아 예, 거기 인더스트리 슈트라세 맞습니다. 누가 아프십니까?"
"제가 아니고, 슈퍼마켓 앞에 어떤 남자분이 서계시다가 저한테 앰뷸런스를 좀 불러달라고 해서요..."
"그분 증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머리가 아프시대요. 그리고 복통이 있으시고..."
"머리가 아픈 걸로는 앰뷸런스가 출동하지 않는데요."
"글쎄 말이에요.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자꾸만 불러달라고 하시네요."
"그분 나이하고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한 번 여쭈어 보세요."
"나이는 49세이고 이름은 이브라힘이래요."
"그분 상태가 어떻게 보이시나요?"
"그다지 급하게 병원에 실려 가야 할 만큼 아픈 것 같진 않아요. 멀쩡히 서계시고 말씀도 잘하시고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주치의한테 가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제가 보기엔 앰뷸런스가 출동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분 일로 이렇게 전화 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전화 끊고,
"아저씨, 112에서 두통으로는 앰뷸런스가 출동하지 않는다고요, 내일 아침에 주치의한테 가래요. 거보세요. 제 말이 맞죠?"
"그래요? 앰뷸런스가 안 온대요? 그래서 내일 주치의한테?"
그분은 내 말을 듣고는 단념한 듯 뒤돌아서서 갔다. 좀 전에 그렇게 애타게 부탁한 거에 비하면 112의 말을 전해 듣자마자 너무 쉽게 수긍을 하고 물러서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내게 종합병원까지 태워 달라고 떼라도 쓰면 어떡할 뻔했냐, 태워다 주는 것에서 끝나면 다행이게? 거기서 수속도 밟아 달라고 떼쓸 걸? 하며 일어나지 않은 일 가지고 걱정을 하고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뒤돌아서 걸어가다 그래도 저렇게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진통제 이부프로펜이라도 한 알 주려고 뒤돌아 봤더니 그는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그냥 심심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 한 번 해본 건가?
집에 돌아온 후 그 일이 자꾸 생각났다. 두통은 멎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두통이 없었는지. 설사는 멎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설사가 없었는지. 그럴 수 있다. 사는 게 너무 외롭다 보니 그저 다른 사람의 관심을 갖고 싶어서 말을 한 번 걸어봤을 수도. 행색을 보아하니 그는 혼자서는 사회생활을 하고 살아갈 수 없는 부적응자처럼 보였는데, 어쩌면 정기적으로 사회복지사가 그를 방문하여 잡다한 일들을 케어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오늘 오전에 사회복지사가 이 분의 집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누구라도 좀 만나보세요.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답니다!'라는 조언을 해주었을지 모른다. 그 바람에 그는 집 근처 슈퍼마켓으로 나와 서성거렸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지나가지 않자 누구라도 붙들고 얘기하고 싶어서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고. 순전히 나의 상상이지만.
그런데 왜 하필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했을까? 다른 부탁들도 많고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