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히피 아가씨 티나, 알고 보니 금수저

트럭 타고 세계를 누비다

by 오순이


내가 독일서 얼떨결에 첫 취업을 하고 처음 맞는 쌀쌀한 가을이었다. 병원에 갔다가 조금 늦게 출근을 했는데 처음 보는 개 한 마리가 가게문 앞에 앉아서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이 큰 걸 손으로 치워야 하는 걸까, 넘고 가야 하는 걸까. 이럴 때 정말 당황스럽다. 이것들은 왜 역지사지가 안 되는 걸까, 이심전심이 안 되는 걸까, 자타불이의 정신이 없는 걸까. 내가 개한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걸까. 손님이 데리고 온 개인가 보다 하고 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데 어떤 여자가 그 개를 불렀다.

‘레토, (체코 말로 여름이란 뜻) 이리온.’

개 주인은 처음 보는 여자다.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 없는 행색에 키도 다른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그 여자는 새로 들어온 직원인듯했다. 사장님은 우리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어쩌면 저렇게 껑충하고 선머슴아 같은 히피를 직원으로 뽑았을까 싶었다.

그 선머슴아는 걸을 때도 그냥 걷지 않고 탭댄스를 추며 걸었고 늘 휘파람을 불고 다녔다. 행색은 더 가관이었다. 180센티가 넘어 보이는 키에, 막대기처럼 꼬아붙인 치렁치렁한 레게머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말이 엉덩이 까지지 키가 크다 보니 머리끝에서 엉덩이까지의 길이가 1미터는 족히 돼 보인다.

이 1미터짜리 긴 머리채를 하고 몽당연필을 귀에 꽂았다. 흔히 설계도를 그리는 건축사들이 하듯 귀 뒤에 몽당연필을 꽂은 게 아니다. 뚫은 귓불에다 그 굵은 것을 꽂아 넣은 거다.(나중에 설명하기로 총으로 뚫은 구멍에다 날마다 조금씩 굵은 것으로 구멍을 넓힌 결과 나중에는 연필까지 넣을 수 있게 되었단다) 게다가 머리채에는 장식이랍시고 군데군데 껌종이 같은 알루미늄 박을 둘러 포인트를 주었는데 그 행색이 어찌나 가관인지...

외모가 이렇게 선머슴아 같지만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참 예쁘다. 밝은 블론드에 발그레한 볼, 귀염성 있는 눈코 입과 조막만 한 머리. 8등신이 아니라 9등신이다. 튼 손등이랑 손톱 밑의 때만 빼고 좀 꾸며놓으면 슈퍼모델 뺨칠 자태다.

이 히피는 남자 운동화를 신고 낡아빠진 청바지에 날씨가 쌀쌀함에도 불구하고 짧은 팔 티셔츠를 입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신입 같지가 않다. 전화도 척척 받아 주문을 적고 계산대 앞에 서서 손님한테 농담을 걸며 계산하는 품이 말이다.

‘누구냐, 넌?’

하고 묻자,

‘티나’

하고 대답한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싶었는데 그녀는 자기 이름만 달랑 말하고는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다. 참 구김살 없는 젊은 아가씨다. 알고 보니 그녀는 사장님의 둘째 딸이었다. 사장님의 자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일단은 정원사가 딸린 작은 연못이 있는 큰 집에 살고 있으니 부자라 치고, 그러니 티나는 행색은 저렇지만 금수저인 셈이다.

‘너 한국에서 왔다지? 한국말 좀 해봐. 참새처럼.’

티나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 아가씨들은 참새처럼 말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고 했더니 그녀는 금수저답게 한국 학생들이 몇 있는 영국의 한 기숙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거기서 한국 학생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며 참새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수다를 떨었기 때문에 한국사람 하면 그 수다가 생각난단다.

이렇게 우리의 첫 대면이 시작되었고 티나의 삶의 방식에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붙어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유럽엔 참 여러 가지 형태로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 새삼 놀란다.

티나는 독일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영국서 대학 재학 중에 히피의 삶을 접하고 공부를 중단했단다. 그 후 트럭을 타고 유럽을 떠돌아다니는 히피가 되었다. 얼마 전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트럭을 타고 누볐으니 그녀의 활동범위가 유럽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이 당찬 아가씨는 머지않은 미래에 트럭을 타고 유럽에서 중국까지 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가을이 지나고 그녀는 남미에 갔다. 물론 트럭이 대서양을 건너갈 순 없으니 배에 실어서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보냈고 자신은 비행기를 타고.

그녀가 트럭을 타고 히피 생활을 하게 된 데는 비즈니스형 히피인 한 이탈리아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를 만나면서부터 무작정 떠도는 히피 생활을 접고 돈을 벌어가며 떠돌아다녔다. 우선 알음알음 알게 된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모아 단체로 트럭 하나를 장만했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중앙 아시아니 인도 등을 떠돌며 값싼 것들을 사다가 유럽에서 되팔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가게에서도 천연 모직 숄을 4만 원에 팔고 있었는데 그게 그녀가 중앙아시아 어디에서 사들고 온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주업이 물건 사서 되팔기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지역 페스티벌 기웃거리기’가 이들의 주업되겠다. 말하자면 전 유럽의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이들의 먹이인 것이다. 페스티벌에서 허가받지 않고 술이나 음료수 등을 팔아서 돈을 번단다. 이것은 어디서건 불법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독일에선 이렇게 장사를 하다 걸리면 벌금딱지를 떼이는 것은 물론이요 각종 집기들을 경찰에서 압수하여 벌금 낼 때까지 보관한다. 게다가 먹고 마시는 것을 팔 기 위해선(일일찻집이라 해도) 식음료 법에 의거하여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허가를 받으면 추첨을 하거나 분양을 받거나 줄을 서거나 해서 자릿세를 내고 장사를 하는 것이 정석인 것이다.

하지만 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이들이 정석으로 장사를 할 리가 있겠는가? 번번이 불법으로 페스티벌을 기웃거리다 한자리 비집고 들어가 장사를 하는데 불시에 들이닥칠 경찰을 대비해서 늘 망보는 사람을 둔단다. 한 번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 후퇴를 거듭하다 최후의 수단으로 물풍선을 던지며 경찰에게 저항하기도 했단다.

티나는 주로 페스티벌이 잦은 프랑스나 스페인에서 장사를 하다 가을이 되면 엄마품으로 돌아왔다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는 다시 히피로 돌아갔다. 올 때마다 친구들을 데려오거나 바뀐 남자 친구를 데려오거나 했지만 크리스마스까진 꼭 엄마 곁에서 머물렀다가 떠났는데 한 번은 오자마자 떠나는 일이 생겼다.

프랑스 와인농장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보르도행 비행기를 예약했단다. 포도밭 노동이 힘들긴 하지만 거기선 포도를 따면서 양질의 와인을 실컷 마실수 있다며 궁궐 파티에 초대받은 듯 들떠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와인농장에서 정말 초대장을 보내왔고 나는 정중한 영문으로 쓴 그 초대장을 직접 읽어보았으니 초대받은 게 맞다. 농장에선 작년에 포도 수확 노동자로 일한 티나에게 올해도 잊지 않고 연락해 준 셈이었다.

티나는 초대장을 받고 1주일인가 있다가 와인농장으로 훌쩍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니 주인을 따라나서지 못한 개는 가게문 앞에서 노상 졸고 있었고, 그녀의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가게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올 때는 몰랐는데 가고 나니 빈자리가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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