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웃 뚜웃 뚜웃 세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나면 정확하게 전화기를 드시는데 내가 전화한 줄 알면서도 친정엄마는 '은지가?' 하지 않고 '여보세요!' 하신다.
오늘은 이탈리아로 휴가를 다녀왔다고 일단 5분이상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이탈리아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그동안 전화를 안해서 2주내내 걱정돼서 고통스러웠다는 말,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악다받게 그래 돌아다녔쌌노,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병실도 부족한 이탈리아에서 객사할 뻔 안했나 하시며 매스컴에서 들은 각종 코로나의 위험성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내게 지청구를 주셨다. 앞으로 외국으로 싸다니지 말라는 말에 나는 건성으로 예 했다.
나는 친정엄마께 걱정을 끼쳐드린 죄책감이 들어 칭찬받을 말을 생각해냈다.
이탈리아에서 내내 썬크림을 바르고 다녔어.
잘했다고할 줄알았는데 도리어 썬크림을 발랐다고 또 야단을 맞았다. 친정 엄마는 최근에 알게된 썬크림의 부작용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으신다.
거기에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들어있어 피부암을 일으킨다는 말도 있으니 앞으로는 썬크림을 바르지 마라.(우리 친정엄마의 주장이니 사실과 무관함을 알려드림.)대신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되도록이면 긴팔을 입고 다녀라. 아참, 자외선이 피부 뿐만 아니라 눈에 좋지 않으니 꼭 자외선 차단되는 썬글라스는 쓰고 다니고. 화장품 사는데, 자기를 가꾸는데, 건강을 위하는덴 돈 아끼지 말아라.
예.
솔직히 너는 오죽이나 안가꾸고 살면 3살이나 많은 느이 언니보다도 더 늙어보인다.
...
우리 친정엄마의 말씀이 맞다. 언니보다 내가 늙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등치때문이지 피부관리하고는 상관없다. 내가 중3때부터 주욱 언니보다 늙어보였다. 언니보다 늙어보인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거나 경쟁심이 들지는 않는다. 니가 언니보다 못생겼다고 했어도 나는 그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신 나는 언니보다 공부를 잘했다. 그거면 됐다.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창시절에 언니보다 공부 좀 더 잘한 부심이 평생간다. 나한테는 예쁜 것보다 공부잘하는게 더 중요하니. 언니야 당연히 지가 나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느끼겠지만. 피장파장.
사실 피부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언니에 비하면 나는 관리랄게 없다. 비누로1일 2회 얼굴을 씻는것 외에 더이상 관리를 하지 않는다. 화장을 하지 않고 크림도 거의 바르지 않는다. 물론 썬크림을 바르고 다녔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그런 냄새나는 찐득한 것들을 피부에 바르는 것이 영 찝찝해서이다. 무색 무취의 베이비 오일은 가끔 바르는 편인데 이번엔 베이비 오일을 안챙겨가는 바람에 식용유를 바르고 종일 해변에 누워 몸을 태웠다. 식용유 때문인가 저녁답에 모기들이 달려들어 얼른 씻어냈지만. 이 사실을 친정엄마께 그대로 말했다가는 또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까 싶어 그 얘긴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친정엄마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류의 교양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한 덕분에 반 의사가 되어 몸에 좋은 것은 다 알고계신다. 오늘은 자기관리를 위하여 콜라겐을 섭취하라고 강조하셨다.
자외선은 주름과 기미를만드니 피하고 콜라겐은 주름을 펴주고 피부를 탱탱하게 해주니 섭취하라. 돈아낄 요량말고 비싸더라도 약국에 가서 콜라겐을 사먹어라.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탱탱한 피부다. 좀 못생겨도 피부가 좋으면 한 인물 먹고 들어간다.
예.
단백질 섭취와 운동의 중요성도 언급하셨다.
늙으면 살이 흐물흐물해지고 근육이 없어진다. 나의 허벅지 근육들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다 사라져 예전에 단단하던 살들이 다 흐물하게 변했다. 근육이 없어지면 힘도 없어지지만 근육이 지탱해주던 뼈들이 내려앉아 몸이 늙은이 몸매처럼 구부정해지니 꼭 근육운동을 하고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라. 계란 두 개를 밥할때 압력밥솥에 넣어서 같이 쪄서 날마다 먹어라.
예.
늘 놀러다닐 궁리만 하지말고 노후를 위해 돈을 아껴라. 늙어서 돈없으면 비참하다. 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펑펑 써대지 말고 아껴써라.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늘 돈돈 하지말고 건강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즐겁게 살라고 하시니원...)
예.
나는 건성으로 15분동안 예예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친정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약국엘 가서 콜라겐을 사먹을 사람이 아니고, 자외선 차단을 위해 창이 넓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다닐 사람도 아니며, 피부를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관리할 사람도 아니다. 나이들어 후회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안느껴진다.솔직히 콜라겐이니 칼슘제품이니 비싼 화장품이니 이런 것들의 효능을 믿지도 않는 편이고.
집으로 돌아오니 미나(11살)가 친구네 집엘 가고 없었다. 8시가 다되어 느지막히 들어온 것한테 하루종일 뭐하고 놀았냐고 하니 쇼핑센터에 가서 양말도 사고 치도바에서 밥도 먹고 에다네 집에 작은 수영장을 만들어놔서 거기서 놀다왔단다. 치도바에서 돈은 누가 냈냐니까 에다가 냈단다. 나는 여기서부터 미나에게 폭풍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지난번에도 에다한테 얻어 먹어놓고 또 얻어먹냐, 친구간에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지 연달아 두 번이나 얻어 먹으면 안된다. 사람간의 관계라는 것이 일방적이면 그 관계는 깨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음에는 꼭 니가 내라.
예.
에다집에 가서 어른들한테 인사는 잘했냐? 사람이 인사성이 있어야 어딜가서든 칭찬을 받는다. 누구를 만나든 정답게 인사하는 거 잊지 말고.
예.
그런데 그 꼴을 하고 종일 돌아다녔냐? 더운데 샌들을 신을 것이지 양말에 운동화가 다 뭐냐. 휴가가기 전에 사준 원피스는 어쩌고 그 걸레 쪼가리같은 옷을 입고 다녔냐. 머리는 단정하게 묶고 다니랬더니 치렁치렁 풀고서는. 아침에 나갈때 빗질은 했냐? 그 치렁한 머리 하루에 한 번 빗질안할 거면 내가 싹둑 잘라버릴테니 날마다 빗질하는 거 잊지마라.
예.
나갔다 들어오면 손부터 씻어야지 그러고 섰냐? 당장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부터 씻어라.
미나가 이렇게 대꾸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예 예, 알았어요. 딱딱딱 알아서 잘 할께요.
존댓말 할 줄도 모르는 애가 웬일로.
미나는 딱딱 알아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다음에도 죄책감없이 에다한테 얻어먹을 것이고, 어른들한테 상냥하게 인사하는 대신 뻔히 쳐다만 보거나 건성으로 인사할 것이고(생긴 건 안 그런데 애가 도대체가 뚱해서), 치렁치렁한 머리는 빗지 않은채 걸레 쪼가리같은 옷을 입고다닐 것이고. 지딴엔 그 걸레 쪼가리들이 원피스보다 더 세련돼보일지 모를 일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지 모를 일들이지만 지금은 그 일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안느껴지겠지.
쯧쯧, 너나 나나 딸이란 것들은 원래부터가 엄마 얘길 건성으로 듣지... 늘 엄마 말 건성으로 듣다가 쓴맛 보고나서야 후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