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감기로 집에 있는 중이다. 지난 월요일 오후에 조퇴했으니 금요일까지 4일반.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어주길,
12월15일 화요일- 12월18일 금요일/업무불능 증명서
요렇게 의사가 진단서를 끊어줬으니 나는 일주일동안 집에서 쉰다. 사실 목요일 오후가 되니 기침도 잦아들고 해서 금요일에는 출근을 할까 생각을 해봤지만 솔직히 요즘은 사무실에서 기침을 하면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모른다. 그런 눈치를 받으면서까지 출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회사에서도 감기 몸살에 걸리면 무조건 집에서 나을때까지 푹 쉬라고 했었고.
그러다 수요일날 개인적으로 송금할 일이 있어 회사에서 지급한 랩탑을 열었다가 아뿔싸 ...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내가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에 대해 얘기를 좀 하자면,
카카오 앱, Whats App, Youtube앱 상단 오른쪽에 작고 동그란 숫자가 쓰인 꼴을 못보는 사람이다. 어떤 소식이라도 오면 읽어서 그 숫자를 없애야 하는 강박이 있다. 집에 청구서가 날아오면 그것을 핀으로 보드에 고정시켜놓은 꼴을 못본다. 지불기한이 한 달이 남았더라도 빨리 지불해서 서류철에 넣어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이번 달에도 방만구 씨의 청구서 2개를 내가 단독으로 지불해버렸다.(우리는 서로의 월급통장이 따로 있으며 서로의 청구서를 따로 지불함) 지불해버린 이유에 대해 말하라면, 그것들이 2주 넘게 핀보드에 꽂혀 있어서. 핀보드가 달려있는 복도를 지나칠때마다 미지불 청구서를 보고 정신병이 걸릴 것 같아서. 방만구씨가 천하태평으로 있다가 독촉장이 날아오고, 그제야 독촉비(!)와 더불어 청구서를 지불하는 꼴을 보면 내 명이 단축될 것 같아서. 결국 이 모든 꼴을 보고 부글부글 참아내다 이혼할 것 같아서.
알고보니 방만구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꽤 많았다. 나의 상사. 사람좋은 그는 책상에 온갖 잡서류들이 두서없이 널어놓고는 늘 만족스럽게 회전의자에 앉아 전기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정신 시끄러워서 그 자리엔 별로 가고싶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그 자리를 스윽 지나가다 메일함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 눈은 2배로 커져서 파란색으로 쓰인 숫자에 멈춰섰다.
읽지 않은 메일 1150개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1150개나 되는 새메일을 안 열어볼 수가 있을까? 상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들은 다 스팸이며 몇 년동안 모은 거라고 했다. 아웃룩에 얼마나 멋진 기능이 많은데... 아니 왜? 그런 메일을 정리하기 위해 아웃룩 익스프레스에서는 아주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법칙을 클릭하고 법칙 정하기를 클릭하고 이 메일주소에서 온 메일을 쓰레기통으로 넣기를 클릭하면 과거에 온 메일 뿐 아니라 미래에 올 메일까지 자동적으로 메일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왜 비싼돈 내고 그런 기능을 안쓰냔 말이다. 살다보면 안읽은 메일함에 몇 백 개씩 메일을 넣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앉아 있는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내게 있어 그러한 일은 몸에 수백 개의 부스럼을 가지고 있으면서 긁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 그런 사람의 메일함은 왠만하면 쳐다보고 싶지 않다.
말하자면 다 나의 강박증이다. 갱년기가 되면서 더 심해지는.
하여간.
그저께는 아파서 누워있던 와중에 급히 송금해야할 개인적인 청구서가 있어서 회사 랩탑을 열고 로그인 하였다. 송금을 후딱 처리한 후 랩탑을 닫으려다 눈이 하단 아웃룩 익스프레스 로고로 갔다. 회사메일함을 살짝만 열어보자, 뭐가 들어왔는지 아주 살짝만.
아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부스럼이라면, 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메일함에 새로 들어온 메일이다. 물론 그것들이 좋은 소식일리 없지만. 나는 누구에게서 몇개의 메일이 왔는지 주욱 훑어보았다.
Taunus 16
Meegeren 2
Dornbach 1
Frankfurt 1
Zweibrücken 1
Keller 4
Paul 2
Bachmann 2
Klemen 1
Rechnung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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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메일을 열어서 숫자들을 없애고 싶었지만 그러면 큰일난다. 어떤 것은 읽어본 이후에 '안읽은 것으로 표시하기'라고 해두어야 하고, 중요한 것에는 빨간 깃발을 꽂아두어야 한다. 주욱 읽어 내려가다가 Klemen에서 멈췄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회계사이다. 중요한 메일만 보내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클릭했더니, 아뿔싸! 오늘이 오스트리아 부가가치세를 납부하는 날이었다. 깜빡 하고 있었다. 내가 그냥 두면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만, 내가 늘 하는 일이므로 그 사람이 놓칠 확률이 높다. 오늘이 납부 마지막 날이므로 그 사람이 놓친다면 우리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통장을 열어보니 그도 그럴것이 아직 부가가치세가 납부되지 않았다. 나는 얼른 부가가치세를 납부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없는데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Klemen 씨의 메일 딱 하나만 읽어 보려고 했던 것이 다른 것들도 하나 하나 다 읽어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중 꽤 중요한 것으로 판단되는 메일에 답변을 하느라 1시간이나 걸려 엑셀 리스트를 만들어 보내는 불상사를 만들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일하다 랩탑을 닫았다.
랩탑을 닫고서야 생각이 났다.
'근데, 내가 미쳤나봐. 우리 회사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뭐야, 저 여자, 아프다고 조퇴하더니 꽤병이었던거야?
아니면,
'아픈 사람이 왜 일을 하고 자빠졌어? 저러면 우리는 뭐가돼? 아파도 저여자처럼 일해야 될 거 아냐?'
이 모든 것은 이런 강박이 있는 내게 홈 오피스를 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것이다. 홈 오피스를 보통날에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회사 랩탑이 집에 있으면 몸이 아플 때에도, 휴가때에도 자꾸 열어서 메일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에 그치지 않고 도미노처럼 자꾸 열어보게 되니 그러면 전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홈에 오피스가 있다면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 일하게 되는 확률도 높아진다. 동료로부터 그것 하나만 좀 확인해줄래? 내가 깜빡하고 잊어버렸지 뭐야? 하면서 부탁이 날아온다. 일이 어렵지도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홈에 오피스도 있다보니 안해주기도 껄끄럽다. 애가 아파서 집에 있으면 괜히 회사눈치가 보여 랩탑을 열어보게된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애가 아픈데 집에서 팽팽 노는 것이 맘편하지가 않은 거다. 홈에 오피스가 없다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쌩까겠지만...
그러므로 나는 주장한다. 일은 회사에서, 휴식은 집에서. 분리를 해야한다.
성철 스님도 그러셨다.
홈은 홈이요, 오피스는 오피스로다.
PS. 이 글을 읽으며 사람들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저 여자는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워커홀릭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일하는 것이 너무 너무 싫다. 먹고 살아야 하고 여행을 가야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것이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을 하려고 안달인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사냥개가 지쳐서 달리기 싫으면서도 토끼를 따라 죽자 사자 뛰어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일이 있으면 그냥 두질 못하는 본능이랄까. 일을 미친듯이 해서 끝내 놓고도 뿌듯하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일을 기꺼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