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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 Sep 28. 2021

눈 떠보니 제주댁이 되어 있었다

꽤나 괜찮은 삶을 뒤로하고 제주로 내려오게 된 이야기

프롤로그 같은 Episode #1


바쁜 삶이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대기업 광고대행사를 5년째 다니면서 인정도 받고 있었고, 30대 중반인 만큼 스스로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 가고 있다는 알 수 없는 긍정마인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분당에서 마포까지 서울 중심부를 뚫고 출근하는 90분이라는 시간이 딱히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보면,  내가 다녔던 회사, 그리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내가 하는 일을 제법 좋아했던  같다.


하루 3시간씩, 일주일에 15시간 씩을 길바닥에 버리면서도(물론 주유비도 어마무시했다),  가끔 밥도 못 먹고 무기한 이어지는 회의와 야근이 있었음에도, 난 여전히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출근길에는 주차장이나 마찬가지인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서히 뇌를 깨웠고, 퇴근길에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꽉 막힌 반포대교 위에서 한강 야경을 즐겼다. 반포대교가 답이 안 나올 때면 잠수대교를 건너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워 노을 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  도시에 나의 자리가 있다는   감사하다' 생각을 자주 했었다. 원래 쉽게 감사해하고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성향이긴 하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 행복한 가족, 멀쩡한 몸, 현명한 친구들까지 둔 내가..

눈 떠보니 제주댁이 되어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창 밖의 말들과 돌담을 바라보면 소름이 끼친다.


30대 중반이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드는 생각이겠지만, 나 또한 유일하게 결핍으로 느껴진 부분이 '나와 찰떡인 짝꿍을 만나는 것'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 연애를 해보고 또 똑똑하게 하는 편에 속했지만, 30대에 들어서고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사실 진득하게 누구를 만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근무한 2년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기약 없는 연애가 무작정 하고 싶다기보다 이제는 늘어지게 연애하는 것이 아닌, 둘도 없는 유일한 내 사람을 찾아 단기간 내 효율적인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익히 알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광고대행사를 다니게 되면 보통은 워라밸이 좋지 않다.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이고, 급작스러운 광고주의 부름은 일상이며, 계획에 없던 출장 등으로 있던 약속을 파투 낼 수밖에 없게 되면서 많은 친구들의 의리를 가루로 만들어놓거니와 잘 지내고 있던 연인마저 떠나가기도 한다.


4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사실 회의감이 안 드는 게 이상할 수 있다.

친구들이 자식들을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하고 주변에서 여성의 나이와 생산성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면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안 되겠다 싶어, 소개라는 소개는 가리지 않고 전부 다 받았다. 더 이상 콧대 높게 굴 시간이 없었다.

표본이 많아야 그 속에서 나와 꼭 맞는, 내가 기다려왔던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설정해두고 정말 많은 분들을 소개받았고, 체력은 소진한 대신 서울에 있는 맛집을 많이 알게 됐다.


결국은 2020년 12월 말을 싱글로 맞이했다.

내가 문제인 것일까, 그저 잘 맞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것인가, 골든 타이밍을 놓친 것인가.

아주 찐한 현타가 왔다.


그러다, 2021년 1월 1일 아침에 아주 특별한 해가 떠올랐다.


2021년 1월 1일 일출 @창원


아버지가 계신 창원에서 새해를 맞이하려고 갔고, 그곳에서 1월 1일 아침 새해 첫 해를 보았다. 매 번 자느라 못 봤던 일출인데, 2021년은 왠지 느낌이 달랐다. 한 살 더 먹으면서 아침잠이 없어졌을 수도 있겠으나 요즘 내 주말 아침을 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마치 그 해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라고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여전히 코웃음 치지만 당시 정말 묘한 느낌이 들었다. 헛된 희망 같은 건 품지 않는 내 속에서 무언가 확신이라는 열매가 몽글몽글 자라나고 있었다. 이번 해에는 네가 기다리던 짝을 만날 거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해를 보면서 희망에 가득 차 웃는 나를 보고 엄마는 왜 저러냐고 하셨다.


"엄마! 아빠! 이상해! 나 올해 내 짝 만날 것 같아!"

"응~그래~꼭 만나~"


....





그러부터 약 한 달 뒤인 2월 초, 현재 내 남편을 만나 서로 첫눈에 반했다.

4월 말, 양가 인사를 드리고 6월 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7월, 눈 떠보니 나는 제주댁이 되어 있었고 지금까지 약 3개월째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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