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2011년 12월, 신입 공채로 처음 직장인이 된 후로 대학원 생활 2년을 제외하고는 일을 쭉 해왔었다. 대학원 때도 프리랜서로 일을 했으니 했다고 치겠다. 디자이너로, 광고회사 PM으로, AE로, 마지막엔 스타트업 운영이사로. 첫 취업 때부터 그려왔던 큰 그림을 어느 정도 달성해가고 있었고, 아직 중도하차 하기에는 커리어적인 상승곡선 상에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좋은 기회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사실 내가 커리어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풀 정장을 차려입고 또각또각 멋지게 출근하는 내 모습을 어렸을 적부터 꿈꾸어 왔었고, 나의 '쓸모' 즉, 자기효능감이 나의 동기부여이고 삶의 원동력이었다.
근 13년을 쉼 없이 일하면서 건방지게도, 아이를 낳아도 커리어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직장 선배들이 육아와 회사생활을 병행하며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것보다 잘할 수 있겠다고 감히 생각했었다. 어린 나는, '아이는 다 알아서 크니 누군가에게 맡기고 난 일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이를 쿨하게 시터에게 맡겨두고, 싱글일 때처럼 훨훨 날아 출장도 다니고 직장에서 촉망 받는 날씬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기분 좋고는 했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나니 정말 손바닥 뒤집듯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이가 좀 들어 임신해서가 아니라, 내 커리어보다도 중요한 어떤 책임감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키우는 고양이 한 마리도 헤어볼을 토하면 불쌍하다고 울먹이며 걱정하는 내가 과연 쿨한 워킹맘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했을 때 과연 내 아이는 행복할까? 아니, 나중에 내가 미안해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을까? 오만가지 질문들이 머릿 속을 윙윙 맴돌았다.
엄마에 따라 혹은 아이에 따라 얼마든지 잘하고 못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나는 가장 먼저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전업주부셨던(지금도 전업주부시다.) 우리 엄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 많은 날들 속에서 항상 내 곁에 계셨다. 부끄러울 때면 얼굴을 숨겨주었던 엄마의 치맛자락도 생각나고, 동생과 싸우면 문 밖으로 내보내놓고는 멀리서 슬쩍 지켜보고 계셨던 모습도 생각난다. 오븐팬에 한 가득 만들어주셨던 엄마표 라자냐도 생각나고, 단지 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창 밖으로 내려다 보며 손짓해주시던 것도 생각난다. 이 따뜻하고 완전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엄마가 워킹맘이셨다면 내 마음 속에 남아있었을까? 출장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서운하게 바라보고,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고 초조해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라는 아이의 성격 상 엄마의 부재에 많은 결핍을 느꼈을 것 같다. 지금도 엄마랑 떨어져있으면 너무 보고싶으니 말이다.
따뜻한 회사의 복지도, 다달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도, 앞으로 펼쳐질 수 있었던 신나고 짜릿한 일들도 모두 포기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우리 엄마가 남겨주신 따뜻한 기억들 때문이다. 엄마는 곧 집이었고, 집은 곧 우리 엄마였다. 나도 우리 아이에게 매일매일 따뜻한 밥을 해먹이고 싶고, 넘어져서 집으로 뛰어오면 내가 괜찮냐고 안아주고 호호 해주며 약을 발라주고 싶다.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면 주방에서 달그락 달그락 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안도하고 몸과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커리어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이야, 전업 엄마를 선택하지 않았을 때보다는 작을 것 같았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난 13년 동안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예쁘고 특별한 생명체를 지구에 데려올 수 있었다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런 위대한 일을 해내다니. 새벽 수유를 할 때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아이가 내 눈을 바라보며 옹알이를 할 때마다 느낀다. 아, 이 모든 순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게 다른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길 참 잘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담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이다. 아이의 모든 처음에 내가 함께여서 정말 행복하다.
먼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사랑을 넘치고 차도록 받아 다른 이들에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아이와의 하루 하루를 꾹꾹 눌러담아 보낼 예정이다. 다른 멀티버스에서는 대표이사나 상무이사 정도가 된 멋진 내가 존재할테지만, 분명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그도 부러워할거다. 자, 이제 두번째 낮잠에 든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서 밀린 아기 빨래를 하러 가보자. 이 멋진 육아 생활을 한껏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