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

by 안광식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이 있다.


오전 7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담배 연기를 휘날리면 오늘 하루가 시작된다.


교통체증에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지만

질척 질척 비가 오는 날씨에 오랜만에 잡은 운전대에서

요즘 즐겨 듣는 노래를 아무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따라 부르다 보면

이런 게 운전하는 재미가 아니냐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슬아슬하게 첫 수업 20분 전에 도착해 준비해뒀던 강의 자료를 프린트하고

오늘도 5분가량 늦은 학생과 마주하면 이내 오늘 일과가 시작된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하고 이후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나에게는 동시에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하나씩을 다 먹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면

이내 함께 일하는 선생님께서 출근하신다.

다음 수업 시작 전 선생님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 학원과 관련된 얘기들을 하다 보면

수업을 들으려 온 학생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1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수업들 가운데서

나는 매 시간 다른 나이의 학생들과 수업과 관련된 얘기들

그리고 가끔씩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강의시간 중간중간을 쉬어가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핸드폰의 시계가 오후 8시 30분을 가리키면 몸은 피곤함에 이미 지쳐버렸더라도

마음만은 알 수 없는 해방감에 어서 이 곳을 탈출하고 싶어 근질거린다.


"내일 봐요"라는 말을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남기고 밖으로 나오면 조금 전의 해방감은 온 데 간데없고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몸 전체에 퍼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인다.

어두컴컴한 밤일지라도 입에서 내뿜는 연기는 여전히 선명하게 잘 보인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나오는 입김인지, 혹은 마음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숨인지

이제 막 뱉은 연기가 자욱이 도 퍼져 주변을 맴돈다.


핸드폰 잠금화면을 해제하고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유독 눈에 밟히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담배를 몇 모금 더 몸속으로 집어넣은 뒤

이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전화기 너머로만 듣던 목소리가

몇 분 뒤 바로 내 옆에서 들려오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두 명이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에 '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과 주고받는 큰 의미 없는 말들에 이유 모를 웃음이 난다.

대화의 이유가 필요했던 지난 몇 시간 동안의 대화보다는

별 이유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대화가

더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


나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때에 나는 드디어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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