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과 가끔보다는 더 가끔씩 마주하고는 한다. 이런 상황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평소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보다 그 깊이나 울림이 더 큰 것 같다.
우리 학원에는 '민서'라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다. 이름만 보면 여자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남자아이다. 처음 이 친구를 만났던 건 올해 1월이었다. 학원에 입시상담을 하러 온다고 한다면 보통은 학생과 어머님 정도가 방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민서를 처음 만났던 날은 시작부터 달랐다. 그 날은 입시상담에 아버님까지 동참했던, 부모님 두 분과 함께 상담을 진행했던 첫 번째 날이었다. 이 날 상담은 약 30분 정도였는데 시간이 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어떤 특별함이 있었다. 우선 민서의 부모님들의 얼굴에는 상담을 진행하는 시간 내내 미소가 서려있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사람 좋다는 인상이 들 정도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두 분의 말씀들 중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말씀은 "공부를 엄청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남들 하는 정도만 따라가도 괜찮습니다"이다. 대게 상담을 하다 보면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들보다는 함께 오신 어머님에게서 성적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볼 수 있는데, 잘하지 못해도 좋다니. 얼마 후 민서가 테스트를 끝내고 가져온 시험지를 가져왔다. 시험지를 확인하고 빨간 볼펜으로 채점을 하려고 했는데 정답보다는 오답이 훨씬 많았다. 틀렸다는 표시가 너무 많으면 민서를 포함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괜히 뻘쭘해질까 오답들 중 몇 문제 정도는 정답으로 표시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아까 전 민서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셨나.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래,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전 애써 상황을 모면하려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역시나 시험지에 정답으로 체크된 문제가 거의 없었다. 이쯤 되니 문제를 풀었던 당사자였던 민서가 괜히 본인 스스로 실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민서가 말했다. 이 친구의 얼굴에는 티끌만 한 실망감도 없었다. 단지 부모님을 닮은,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순수한 미소 만가 득했다. 이 한 마디를 끝으로 민서는 시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님은 보통 한 숨을 쉬시면서 "선생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집으로 돌아가신다. 하지만 민서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민서가 무슨 얘기를 하든 그저 웃으시며 민서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아이가 부모님들로부터 존중받는 분위기는 책이나 영상매체에서나 경험했던 나는 그 상황이 약간 낯설었지만,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부모님들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는 아이이 미소는 한 없이 맑고 순수하구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이라는 말과 민서의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그 날 상담은 마무리됐다. 그렇게 민서는 새로 오픈한 학원에서 나의 첫 번째 학생이 됐다.
민서는 지금까지도 참 맑은 미소를 가진 순수한 아이다. 어찌나 순수한지 거짓말도 못하고(아마 하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꾸밈없이 잘 드러낸다.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하고 있던 어느 날, 민서는 뜬금없이 내게 수업과는 전혀 관련 없는 말로 나를 굉장히 당황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참 순수한 사람인 것 같아요"
당시 상황은 개념 설명이 끝나고 민서가 이제 막 문제를 풀고 있던 때였다. 그날은 편도선이 많이 부어 출근 전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던 탓이었는지, 수업이 활기찬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와중에 민서는 이 한 마디로 강의실의 조용했던 분위기를 한 순간에 바꿔놓았다. 나는 조용히 문제를 풀고 있던 민서가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했다.
"민서는 왜 선생님이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니?"
민서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방금 전 내가 물어본 말에 대답했다.
"제가 어제 급하게 회를 먹어서 속이 답답했는데, 학원에 와서 선생님을 보니까 속이 풀렸어요"
민서의 입에서 나온 답변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 페이스북에서 어떤 유치원생 여자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쓴 편지 내용 중에 "고마워,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동안 꽃이 피었어"라는 글귀를 읽었던 적이 있다. 정말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이 편지를 받은 남자아이는 얼마나 기뻤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읽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글귀를, 내 눈 앞에 있는 학생으로부터 들으니 참 뭐라 말하기 힘든 기쁜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고마워 민서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들로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생님으로 만들어준 민서. 그때 그 말이 평소 민서의 성격처럼 그냥 뜬금없이 나온 말인지 또는 컨디션 난조로 힘들어하는 나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는 의도로 한 말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 나에게 민서가 해준 그 말들은, 내가 출근 전 병원에서 맞고 온 주사보다 훨씬 강하고 효과가 좋았던 약이었다는 사실이다. 민서는 입에 만병통치약을 지니고 다니다 보다.
고마워, 너와 함께 수업하는 동안 선생님 마음에서 꽃이 피었어. 앞으로도 잘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