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 3단 달력이 걸려 있다. 탁상달력은 매일매일 그 순간만 산다. 11월 1일, OO용돈. 11월 2일, OOO결혼식. 11월 3일, OO모임. 11월 4일, OOO생일. 뭐 이런 식이다. 무미건조와 의무의 나열이다.
반면 벽에 걸린 3단 달력은 나름 로맨틱하다. “아! 이제 곧 11월, 한 해가 끝나가네.” 잠시 현재를 곱씹어 보게 된다. ‘아! 지난달에는 부산여행이 너무나 즐거웠지.’
우두커니 서서 3단 달력을 바라본다. 있었던 일에 대해 한없는 미화와 합리화 공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 은근히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아! 다음 달은 12월이구나. 올해가 다 가네. 어디 여행이나 가볼까?" 따뜻한 동남아의 풀빌라를 그려 보고 몽골의 게르를 상상하고 이집트의 아부심벨을 다시 옮겨 놓는다.
동시에 90일간의 세로 여행을 가능케 하는 3단 달력이 좋다. 한 달이 마치 한 세대 같기도 하다. 나의 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아래위로 바라보며 회심에 젖기도 한다. 감정의 멀티태스킹을 하는 기분이 드는 달력이다.
서로 다른 시간들을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는 3단 달력은 스마트폰의 일일달력보다 책상 위의 탁상달력보다 거시적인 안목이 있을 것 같아 왠지 마음이 간다.
언젠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일 년짜리 가로 달력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평생짜리 회오리 달력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다.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표현이 하필 ‘일장춘몽’이다.
3단 달력은 움직이는 열차 같다
앞장을 뜯어 내가 과거가 되고 나를 뜯어 뒷장이 현재가 되고 뒷장을 뜯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낸다.
한 달, 두 달 동그라미 속 일정들이 사라져 가면 나는 벽 속으로 들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엄마가 쓰러질까 봐 괜히 걱정했나, 아이가 사는 일에 넘어질 까봐 괜히 마음 졸였나, 콘크리트 벽을 야금야금 파고 들어가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을, 내가 품은 30개의 날들을 부화도 못 시킬 거면서 뭣 하러 꼭 품고 있었나, 열차의 가운데 칸처럼 앞에도 뒤에도
문득 하늘의 달을 보았다. 이번 달을 보았다.
아직은 10월이다.
참 좋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