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주는 게 시인이야.
-그러면 시인이 슬프잖아요.
-괜찮아 시인은.
-왜요?
-시인한테는 슬픔이 시를 쓰는 재료거든
어느 영화의 주인공이 초등학생과 나눈 대화다. 슬픔이 시를 쓰는 재료라고 하니 나의 슬픔을 되짚어 본다.
참 이상하다. 살면서 자주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시의 재료가 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진정으로 슬프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슬픔의 순간을 잊었나 보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살아가기 위한 맷집이 세 진 거로 생각하니 좋은 것이다. 시를 쓸 재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나쁜 것이다. 슬픔이 시를 쓰는 재료라고?
한 번 더 물어본다. 나에 대한 연민으로 흐느껴 운 적이 있다. 얼마나 불쌍한지 측은지심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줄 그릇이 되는지 물어본다.
단지 내 시의 소재로 삼겠다고 슬프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오지는 않는지 물어본다.
슬픔의 방정식이 있다면 나는 늘 부등호의 꽁지에 쪼그라들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세상이 이젠 더 큰 슬픔으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점점 가속도가 붙어 이 세상에 시의 재료만 넘쳐날 것 같으니까. 시의 재료가 되겠다고 온통 슬픔이 넘치면 안 되니까.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슬픔에 대한 정의가 문득 떠오른다. 슬픔은 ‘감정이 아니라 그 모든 감정 뒤에 갖게 되는 지극히 이성적인 상태’라고 했던가.
그래서 나는 이 순간 슬픔을 시의 재료로 삼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