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일기) 루틴을 연기하다

by 올제

직장에서 해고된 다음에도 아침마다 정시에 출근한다며 집을 나서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주 조금 느껴 본 하루다.


가족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휴무일이다. 휴무일임을 밝히는 순간, 나는 스스로 집에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강제로 외출 준비를 하고 비공식적인 가출을 했다.


매일 아침 급하게 집을 나가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다가 돌아오는 루틴을 오늘은 배우처럼 연기해야 한다. 괜히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딱히 갈 곳이 없다. 차를 두고 가벼운 일탈을 하기로 한다. 지하철 종점으로 간다. 텅 빈 전철, 훌륭한 자리를 선택해 책을 펼친다.


시내로 가까워질수록 복잡해지는 지하철이다. 바쁜 직장인 무리에서 빠져나와 비껴가는 이 기분, 나쁘지 않다. 다른 날의 나를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이 느낌, 묘하다.


책을 계속 보려고 하는데 집중이 안 된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일을 안 하니 편해야 하는데 노는 것도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다.


갑자기 내 몸에게 측은지심이 들어 10시 영화를 예매한다. 중앙로역이다. 허겁지겁 내린다. 벌써 비가 그쳤다.


어젯밤 또는 새벽까지 즐겼을 유흥의 흔적이 고스란히 뒹굴고 있는 거리들이 아침부터 웬 청승이냐며 말을 건넨다.


아직도 쓰레기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겨울 낙엽처럼 바람에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너희들도 매한가지라며 대꾸를 한다.


갑작스러운 자유와 예정된 속박 중에 어느 편이 더 행복한 것일까, 하고 눈짓을 해본다.


어젯밤이 왜 우리를 여기저기 던져두고 가버렸는지 한 번 생각이나 해보고 그런 질문을 던져라, 그러면서 그들이 가열찬 야유를 보내온다. 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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