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수록 넓어진다
버릴 수 있는 건 버려야 가벼워진다
산속에 집을 짓고 거의 십여 년을 살았다.
별장처럼 지내려고 지었으니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 이것저것 꾸며 놓았다. 서울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짐은 다 시골로 갖다 놓았다. 심지어는 선교사 나간 딸내외 짐들과 손자 것들까지 모두 널찍한 시골에 갖다 놓았다. 그래도 시골집엔 창고도 있고 여기저기 짐 놓을 때가 많아서 복잡하고 좁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 시골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다시 가게 될 곳은 한적한 시골의 32평대 아파트였다. 이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시골집에 있는 이 많은 짐이 문제가 되었다.
가까운 이웃들에게 쓸만한 건 나눠주기도 하고 시골집을 산 사람들에게 농기구나 연장 같은 것 모두 주기로 했다. 그리고 오래 입은 옷이나 좀 낡은 제품들은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알뜰한 아내가 문제였다. "그거 애들 오면 덮고 자야 할 이불에요. 필요할 것 같으니 버리지 마세요. 그건 고기 구울 때 쓸거니 버리지 마세요"
버리려고 빼놓으면 슬며시 다시 담아 놓는다. 그러니 짐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이삿날 비가 심하게 내렸다. 포장이사라고 불렀는데 비가 많이 오니 짐을 싣다가 못 간다고 도로 짐을 내려놓겠다고 한다. 달래고 얼러서 결국 비용을 더 지불하고 서둘러 이사하느라 버리려고 빼놓은 짐까지 몽땅 다 싣고 작은 아파트로 왔다.
아직 비는 끝 치지 않아 옮기는 것도 힘들었다. 원래 포장이사는 싸 온 짐을 비슷한 자리에 풀어주고 대충이라도 정리해 주고 가야 하는데 시간도 늦었고 물건도 뒤죽박죽 섞여 있어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하는 수 없어 비 맞지 말라고 쌓아온 비닐봉지채 방, 마루 부엌에 쌓아 두라고 했다.
집은 순식간에 세상에 이런 일에 나올법한 쓰레기가 가득 찬 집 같이 되어 버렸다. 이삿짐센터 직원들 너무 늦었다며 소파와 침대하나 겨우 조립해 주고 가겠다고 한다. 아무 데나 물건을 집어넣어도 어차피 다시 손대야 할 일이니 우리가 할 테니 가라고 했다. 막상 그들이 가니 아내와 난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닐 보따리를 풀러 가며 버릴 것과 쓸 것을 구분하고 놓을 곳을 정해서 분리하기로 했다. 아내를 달래 가며 웬만한 건 모두 버리기로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쓸 것도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목요일에 이사해서 다음 주 수요일까지 모두 정리를 했다. 입지 못하는 옷은 동네를 뒤져 옷수거함에 버리고 쓰레기봉투에 넣지 못하는 건 사진을 찍어 면사무소에 가서 보여주고 폐기물수거증을 발급받아 붙여서 버렸다. 그렇게 이사는 마무리되었다.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내고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갖고 있으려는 욕심이 많아서 늘 무겁고 좁게 사는 것이란 걸 알았다. 버리고 비울수록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고 편해진다는 것이다.
이건 물건뿐만이 아니다. 생각도 버리고 비우면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살면서 버리지 못한 생각과 욕심 때문에 이고 지고 힘들게 살아왔지 않았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삶이었구나 또다시 깨닫게 되었다.
앞으론 버릴 수 있는 건 물건이던 생각이던 자꾸 버리면서 살자. 이게 진정한 자유일 듯하다.
사람도 집처럼 담을 수 있는 공간의 크기가 다 다르다. 그러니 그 공간에 어울리게 채워야 쾌적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싸게 판다고 먹고 싶다고 좁은 냉장고를 가득 채워 놓아서 문을 열 때마다 물건이 쏟아져 내린다면 먹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서랍에 옷을 가득 집어 넣어서 옷을 꺼내려고 할 때 옷이 서랍에 걸려서 찢어진다면 잘 보관한 의미가 있겠는가? 많이 사놓은 음식물이 먹기도 전에 상해서 쓰레기가 된다면?
우린 적어서가 아니라 많아서가 문제가 된다.
생각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다. 옛 선조들도 비우는 맛을 알았다. 계영배란 술잔은 7할 정도가 차면 술이 밑으로 넘쳐버린다. 뭐든 꽉 채우지 말라는 교훈이다. 사람마다 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니 각 크기에 맞게 살아야 행복하다. 그릇이 안 되는 지도자가 있으면 항상 시끄럽고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나 자신을 아는 게 먼저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번 이사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 몸소 체험한 귀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