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우표

이관순의 손편지 (19-19)

by 이관순

부치지 못한 우표

내 서랍엔 아직 쓰지 못한 새 우표가 22장이 있습니다. 바인더 갈피에서

15년째 잠자고 있는 대한민국 우표…. 편지 쓸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

다 부쳤어야 했는데, 22통이나 되는 미 발신 편지를 내 게으름 때문에

방치한 것 같아 우표 보기가 미안합니다.


우표 한 장이면 전국 어디든 마음을 실어 보냈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붙인 모양에도 마음이 담긴다고 우표를 반듯하게 봉투에 붙여서 창구에

디밀고 나올 때의 기분은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양 입꼬리를 올리던

기억이 정겹게 떠오릅니다.


많지 않은 용돈에서 그 달치 우표부터 샀던 걸 보면 편지 쓰기를 꽤 좋아한

모양입니다. 편지를 자주 썼으니 오는 편지도 많을 수밖에요. 그 바람에

최전방에서의 졸병 생활이 수월치 않았습니다.

봉투의 글씨체가 곱상한 것은 늘 개봉 흔적을 남겨 내 손에 들어왔어요,

그것처럼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는 일은 없었지요. 짓궂은 선임 병장의

얼굴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남겨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편지는 ‘설렘’과 동의어입니다. 설렘은 보낼 때보다 받을 때 배가 되지요.

기다렸던 편지가 대문 우체통에 들어 있을 때, 답장을 받을 때, 그 기쁨은

편지만이 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면서 많이 불렀던 노래, 어니언스의 ‘편지’도 내게

주는 낭만의 편지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편지만은 꼭 만년필로 썼습니다. 겉멋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정성과

존중을 담고 싶었어요. 글귀가 막히면 창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또박또박

글을 이어갑니다.


사연은 내 것이어도 신경 쓰이는 건 행간을 읽을 그의 모습입니다. 편지가

잘 써지는 날엔 글자 획에도 내 손의 미세한 떨림이 남지요. 팔을 다쳐

한동안 편지를 쓰지 못할 때,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는 손들을 보며

생각했어요.


편지가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 것이며, 사연을 띄워 보낼 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 것을. 게다가 설렘으로 기다릴 눈동자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처럼 탐스런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우체국에 들려 가슴에서 편지를 꺼내고 우표에 침을 발라 붙일 적에

혀끝에 감도는 그 알싸함. 그때의 우표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끝내 안타까운 것은 답장이 없는 내 편지의 행방이었어요.


받고도 답이 없는 건지, 어디로 잘못 미끄러져 가버렸는지…. 물을 곳이

없으니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에 편지가 갖는 공간은 무한대입니다. 지금은 편지

자체가 전설이 됐지만 그땐 편지 한 통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었으니까.

편지를 쓰며 갖는 감정이 그랬고, 받는 편지에서도 그런 걸 느낍니다.

내겐 아직도 다 읽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43년 전 받은 어머니 편지죠.

본가에서 첫 딸을 얻고 살림을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제주도에 가셨던

어머니가 보내셨습니다. 아직도 또렷하게 남은 ‘1977.10.10.’ 자 우체국

소인…. 유약한 돌배기 손녀가 걱정이 되셨던 모양입니다.

43년째 보관해 오는 어머니 편지

아기 몸에 좋다는 벼 윗동 이삭을 잘라 깨끗이 씻고 다듬어 한지에 싸

보내면서 당부하신 글입니다. ‘착한 어멈 보아라. 다녀간 지 수일이 돼

두루 궁금하구나’로 운을 뗀 편지는 어린 며느리에 대한

당부가 절절합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 한 획 한 획에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어머니 얼굴... 아직도 그 사랑의 깊이를 더듬고 있는,

못다 읽은 편지입니다. 때로는 아련하기도 했다가 아득하기도 한

어머니 사랑. 편지만큼 사람들 가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소통 수단이 많아 편지가 귀한 줄 모르지만, 유일한 소통수단이던

편지엔 정성이 있고 마음이 있고 사연이 있었지요. 아직도 마음에 부쳐야 할

편지가 있고, 못다 읽은 편지가 남은 이유입니다.


편지는 설렘이고, 기다림이고, 그리움입니다. 1998년 일기책 갈피에는

또 다른 편지가 숨어있습니다. 내 편지를 받고 부산에서 보내온 친구의

답장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편지엔 그리움이 쏟은 잉크처럼

엎드려 있어요.


❝네가 보낸 엽서로 가을은 도착했다. 아이는 공주 인형에다 옷을 입히고

나는 옆에서 거울을 보며 고단한 삶의 때가 묻은 이마를 닦고 있는데,

그 졸리는 일상에 찾아온 너의 종소리가 눈을 뜨게 했고,

낙엽 하나 그려 보낸 너의 마음이 순정남 같다고 깔깔대며 웃었지.

그러면서 창밖으로 흩날리는 낙엽을 보다가 문득, 아직도 그대로 남은

마음속 얼룩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오래전, 그녀의 마지막 가을 편지가 아직도 내게 안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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